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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섬잔대는 한라산 능선 가까이에서 자라는 제주도 특산 식물입니다. 잔대보다는 키가 작고 그 빛깔이 더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섬잔대를 만난 것은 4·3항쟁으로 사라져 버린 마을 근처에 있는 다랑쉬오름이었습니다. 오름의 맹좌라고 할 수 있는 다랑쉬오름 초입에 서 있는 잃어 버린 마을에 대한 표석은 우리네 아픈 역사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섬잔대를 보면 '고난'이 떠오르고 제주민중들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피어난 꽃인 것 같아 마음이 싸해집니다. 이 꽃의 색깔은 고난의 상징인 보랏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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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오름 중간에 이르니 하나 둘 가을꽃들 사이에서 섬잔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소곳이 수줍은 듯 억새에 숨어 피기도 하고, 바람이 너무 흔들어 대니 작은 나무에 살포시 기대어 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 둘 눈을 맞추며 다랑쉬오름의 능선에 올랐더니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꽃 빛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빛깔의 섬잔대를 보았습니다.

가을꽃들은 향기가 진하고 크기가 너무 크면 추워서 금방 시들어 버리니 꽃이 작습니다. 크기가 작은 대신에 올망졸망 모여서 한송이처럼 크게 피어나 곤충을 유혹합니다. 같은 꽃이라도 절벽에 핀 것이 색깔이 더 진하고 향기도 더 진합니다. 척박한 땅을 불평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자연의 한 면입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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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이나 역사에는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만다면 그저 그렇게 시들어 갈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고난을 부둥켜안고 그것을 더욱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자기 욕심만 부리며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정점에서도 늘 희망을 바라보면서 더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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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삼별초의 난을 위시해서 일제 시대의 항일운동, 제주 4·3항쟁, 6·25 등 제주 땅은 전쟁이나 고난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거으 없습니다. 전쟁터요 유배지, 변방의 섬인 제주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역사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돌과 바람이 많은 것은 자연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여자가 많은 것은 그만큼 제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음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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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 제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인은 유토피아 '이어도'를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늘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들은 제주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섬잔대의 수명은 100년 이상 되는 것도 있다고 하니 다랑쉬오름에 피어 있는 섬잔대 중에는 1948년에 핀 것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 피어난 것일지라도 중산간 지역에서 죽어 갔던 원혼들의 한 맺힌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들판의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제주의 들판에서 피는 꽃들에는 제주의 역사가 들어 있고, 제주인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

ⓒ 김민수
잔대는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딱주, 사삼, 남사삼, 조선제니, 잔다구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예로부터 잔대는 인삼, 현삼, 단삼, 고삼과 함께 다섯가지 삼 중의 하나로 꼽아 왔으며 민간 보약으로 널리 썼다고 합니다. 특별히 농가에서 잔대를 '딱주'라고 하는데 섬잔대는 '개딱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금 그 쓰임새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잔대가 가지고 있는 근본을 섬잔대도 다 가지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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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대는 모든 풀 종류 가운데서 가장 오래 사는 식물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수명이 산삼과 맘먹을 정도라고 합니다. 잔대는 백 가지 독을 푸는 유일한 약초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백'이 의미하는 것은 숫자상의 '백'이 아니라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잔대는 뱀에 물렸을 때, 농약에 중독되었을 때, 중금속이나 화학약품에 중독되었을 때 묘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니 우리네 마음 속에 있는 독까지도 다 풀어줄 것만 같습니다.

ⓒ 김민수
꽃에 취해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많은 잔대를 만났지만 이번 가을에는 가장 진한 빛깔로 피어 있는 섬잔대를 만났습니다. 맨 처음에는 잔대가 아니라 금강초롱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오름의 정상 부근에서 만난 섬잔대라서 그런지, 마침 그를 만나러 간 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피어나니 그 아픔들을 하나 둘 곰씹으면서 그런 빛깔을 만들어 낸 것만 같아 숙연해졌습니다.

ⓒ 김민수
푸르던 들판 버석거리며 갈색으로 물들어갈 때
제 철을 만나 피어나는 꽃
다투어 꽃피워 가는 시절엔 침묵으로
서둘러 꽃닫아 가는 시절엔 아우성으로
그렇게 피어나
밋밋한 들판을 보랏빛으로 물들여 가는
가을꽃들
쑥을 캐는 대장장이의 딸 쑥부쟁이,
매콤한 삶의 향기 산부추,
도도한 아름다움 솔체,
백 가지 독을 푸는 잔대,
바다가 그리워 바다에 핀 해국,
깊은 산골을 좋아하는 용담,
가시 총총 엉겅퀴,
꼿꼿한 부드러움 산비장이......

- <가을꽃>,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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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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