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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유도 선착장,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정도의 갯골을 제외하고 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 김준
한때 무녀도 주민들은 김으로 먹고 살았다

선유도의 모든 마을이 어업으로 살아가지만 마을 구조나 주택의 형태로 볼 때 전형적인 어촌의 모습을 띠고 있는 마을은 무녀도뿐이다. 서들이(무녀1구)와 모개미(무녀2구)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된 무녀도는 김 양식이 주업이다.

새만금이 막히기 전만 해도 무녀도와 인근 신시도 앞에는 온통 김발로 덮여 있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김으로 생활했다. 선유도의 밭너머, 새터, 진말 등도 일부 어민들이 김 양식에 참여했다.

칠산어장에 고기가 고갈될 무렵 완도를 비롯한 남도에서는 김 양식 기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면 완도를 비롯한 지주식 김 양식 지역 어장은 노후화되기 시작했지만 조류 소통이 활발하고 갯벌이 발달한 진말과 남악, 무녀도 앞의 갯벌은 최고의 양식지로 부상했다.

새로운 대체 어장을 찾아 고군산군도로 남도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김 양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신천지를 찾는 것처럼 새로운 양식지를 찾던 남도 사람들이나 이미 양식을 경험한 군산, 부안, 고창 등 연안 어민들이 이곳을 그냥 둘 리 없었다. 멀리 전남의 남해안 사람들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 '모개미'(무녀2구) 마을 선착장에 쌓아둔 양식 김발
ⓒ 김준
▲ 운이 좋게 무녀도 앞 어장에서 김발을 설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김준
새만금 사업으로 모든 양식업 사업에 대해 보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김 양식은 사실 불법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물자를 썩힐 수 없고, 특별한 생계대책이 없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지속하고 있다. 야미도, 신시도도 새만금 사업이 추진되기 전에는 김으로 먹고 살았지만 새만금 사업으로 김 양식 어장이 없어졌다. 설령 있다고 해도 조류의 속도가 느려지고 변해서 더 이상 김 양식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무녀도 염전에 가득 담긴 선유도의 가을하늘
ⓒ 김준

무녀도의 마지막 염한이

고군산군도에 1950년대 초 16만평의 간척지를 막아 만든 염전이 하나 있다. 지금 작고했지만 군산출신의 최현칠씨가 세 차례에 걸쳐 사람을 사서 개인적으로 간척하여 만들었다.

1962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소금을 생산하다 한때 중단되었지만 지금은 그의 아들 최씨(55)에 의해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농지와 염전은 습지로 변했고, 2정(6천평) 정도의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초기에는 뻘을 다져 만든 토반으로 소금을 만들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는 깐팔이라 부르는 질그릇 파편 등을 이용해 결정지를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타일이나 두꺼운 검정색 비닐로 염판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염전바닥에 기록한 기억
ⓒ 김준
▲ 무녀도 염전은 수차를 이용한다
ⓒ 김준
육지에서는 양수기를 이용해 염도를 높인 함수를 염판으로 옮기는 일을 하지만 무녀염전은 과거처럼 수차를 이용해 물을 퍼올리고 있다. 가끔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염전과 수차에 대해 물어와 귀찮게 하지만 최씨는 싫은 기색 없이 소금이야기를 들려주고 수차를 직접 밟아 보는 일도 허락한다.

문득 지난해 8월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전설과 신화의 섬 고군산군도>가 생각이 났다. 선유도, 장군도, 무녀도를 자전거로 돌아보던 이장호 감독이 멈춰선 곳이 이곳 무녀도 염전이었다. 그는 직접 수차를 돌려보기도 했었다.

그 방송은 염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무녀도에 염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로드다큐 이후 선유도를 찾는 사람은 더욱 늘었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찾는 것이 어민들에게는 반가운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숙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환영할 일이다.

"이장호 감독도 여기 왔었어요?"
"그럼, 그 이장호 감독도 여기 와서 찍었지요. 4월인가, 그 뒤로 사람들이 많이 와요."

소금을 거두는 날이면 최씨는 새벽 3시 무렵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아침 10시 무렵 운반하는 일까지 마무리할 수 있다고 한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 물을 대고 빼고, 소금을 거두고, 염전을 보수하는 일이 힘에 겹다. 30kg 한 가마니에 1만 4천원. 몇 년 전 정부의 폐전정책으로 많은 소금밭이 없어지기 전보다 소금 값이 나아졌지만 언제 중단될지 모를 상황이다.

"혼자서 새벽 3시 30분부터 긁어야 10시까지 나르면 딱 맞아요."
"혼자 일하나요."
"혼자 해요. 여그서 물댈라, 저기서 물댈라. 일이 안돼요. 적어도 세 사람은 있어야 돼요."

갯벌을 막아 소금밭을 만들던 시기만 해도 염전이 돈이 된다는 말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염전에 투자를 했던 적이 있었다. 군산에서 제법 부자였던 선친이 이곳 무녀도에 쏟아부은 노력과 자금을 생각하면 지금도 최씨는 화도 난다고 한다. 12살에 몸이 아파 학교를 그만두고 군산에서 무녀도에 들어와 머무르기 시작한 최씨. 지금도 건강한 모습은 아닌듯 하지만 소금 내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다.

"염전이 좋다고 해서 한 거요. 아버님이 처음 한 거요. 저기 제방 막은 대 길이 있잖아요. 둑이 다 바다여. 우리 아버님이 막았어요. 세 번이나 막았어요. 고생만 하셨어요. 돈만 없애불고…. 그 돈으로 염전 안하고 딴 것 하셨으면…."
"얼마나 돼요, 한 두 정(6천평)은 되나요."
"그 정도는 돼요."
"요즘 30kg에 얼마나 해요."
"1만 4천원이요. 오늘밤에 이렇게 바람 불어주면 소금이 솔찬히 오고…."
"중국산이 들어와서 싸지지 않았어요."
"여기는 중국산 안 와요."

호텔에 카지노가 들어선다?

안내를 하던 민박집 주인은 '앞으로 전월이와 새터를 주목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한다. 이곳에 대형 항구가 들어설 것이며 모든 선박과 여객선이 이곳에 집중할 것이라고 한다. 무녀도는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서 놀이공원이 형성되고, 선유도는 자연을 보존하는 해수욕장으로 발전할 것이란다. 기대해 볼 일인가? 왠지 씁쓸함을 버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새만금 사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새만금 사업이 백지화되지 않는다면 선유도와 배로 지척인 신시도까지 육로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지금은 군산에서 1인당 1만원을 훨씬 더 주고 배를 타야 하지만 육로가 열리면 몇 천원이면 선유도에 올 수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무녀도와 선유도를 연결하는 연도계획도 수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안내를 하는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 무녀도의 모개미 마을
ⓒ 김준
▲ 섬에는 물길 따라 마을이 만들어진다(과거 모개미 주민들이 이용한 우물)
ⓒ 김준
굳이 그 계획이 사실이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어장에 두고 바다를 대하는 것과 관광에 두고 바다를 대하는 것은 다르다. 바다에 애정을 두고 바라보면 바다는 생기가 넘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주민의 삶, 주민들 간의 관계, 주민들과 바다, 관광객과 바다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관광개발은 주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생업공간을 황폐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쯤에 전라북도가 내놓은 새만금 갯벌을 막아 골프장을 짓겠다는 이야기도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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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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