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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국제미술제가 열리고 있는 임립미술관 주변의 깃발들
ⓒ 송성영
요즘 온통 각 고을마다 가을 축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롯가 여기저기에 축제의 깃발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나는 시내를 나갈 때마다 각각 다른 장소에 세워진 깃발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동네 앞 큰 도롯가에 서 있는 깃발이고 또 하나는 옆 동네에 자리한 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공주국제미술제를 알리기 위한 깃발입니다.

▲ 벼논 한복판에서 새를 좇아야 할 허수아비들이 멀쩡한 옷을 입고 전시되어 있다.
ⓒ 송성영
임립미술관 주변의 깃발들은 화려합니다. 울긋불긋 천연색으로 화려합니다. 허수아비들조차도 화려합니다. 다 낡아 떨어진 옷보다는 대부분 멀쩡한 옷차림의 허수아비들입니다. 허수아비들은 벼논 한복판에서 새들을 좇아야 할 직분을 상실한 채, 도롯가나 둥구나무 앞에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돼 줄지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임립 미술관 주변의 깃발들은 울긋불긋한 색으로 내 시선을 현혹하고 있었고, 시골 하늘에 난데없이 애드벌룬까지 띄워져 있었습니다. 애드벌룬은 미술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지만 벼 베기가 한창인 들녘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서 자동차로 불과 2, 3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 큰 도롯가에 서 있는 깃발은 미술제의 깃발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루한 나일론 천에 손으로 직접 새긴 조악한 글자체, 조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분명 쌀 개방 압력에 맞선 구호를 써놓은 것 같은데, 구호가 적힌 깃발은 바람에 휘감기고 말려 있어 무슨 구호를 써놓았는지 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 우리 동네 '청년당원동지'가 소작하고 있는 벼논에 세워진 깃발들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다
ⓒ 송성영
그 깃발들은 쌀 개방으로 절망하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깃발을 설치해 놓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초라하기 이를 데 없이 다 쓰러져 가고 있는 깃발들은 분명 우리 농촌의 뼈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예술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주국제미술제의 '예술적으로 세워놓은' 깃발들은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눈에는 그저 화려한 깃발들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벼논에서 쓰러져 가는 깃발들이 훨씬 더 예술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벼논에서 쓰러져 가는 깃발들은 적어도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우리 동네 큰 도롯가에 세워진 그 깃발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적인 예술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동네에는 내가 알고 지내는 젊은 농사꾼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동네 주변에 가끔씩 농민운동에 관련된 깃발이나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고 그 깃발들이 세워져 있는 벼논은 그의 소작 논이었습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그 청년은 20마지기의 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땀 범벅으로 내 앞에 나타납니다. 늘 목이 말라 있습니다.

"성님 계세요? 시원한 물 한 사발 마시러 왔어요."

그는 맹물을 막걸리 사발 비우듯이 벌컥 벌컥 아주 달콤하게 마십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맹물을 찾게 만들 정도로 아주 맛있게 물을 먹습니다. 그는 언제나 다 낡은 중고 트럭을 끌고 다닙니다. 앞뒷면이 다 찌그러져 폐차 일보직전의 중고 트럭입니다. 푸르릉 푸르릉 거리다가 금세 시동이 꺼질 것만 같은데 용케도 잘 굴러다닙니다.

체구가 그리 큰 편도 아닌데 그는 언제나 '상머슴'처럼 씩씩하게 농사일을 합니다. 농사일도 열심이고 농민운동에도 열심입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뭔지 모를 큰 빚을 지고 산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모 정당의 당원인 그를 '당원동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청년 당원동지'라 부릅니다. '국민교육'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사람들이 듣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잔혹무도한 빨갱이'쯤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나를 제발 국가 보안법으로 꽁꽁 묶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 브루스를 치는 사람들이 들으면,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조차 빨갱이로 몰아붙일지도 모릅니다.

곱상하게 생긴 사람은 농사짓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청년당원동지'의 얼굴은 아주 곱상합니다. 안경잡이에 여려 보이기까지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빨갱이'라는 사람들의 별칭이기도 했던 '청년 당원동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땀에 흙까지 범벅된 겉모습은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도 그는 늘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납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씩씩하게 일하고 농민운동을 열심히 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나는 '청년 당원동지'를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올 봄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공주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한 선배로부터 소개받았습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그는 그 날도 역시 시원한 냉수를 찾았습니다.

"시원한 냉수 좀 한 잔 주세요."

나는 그에 대해 속속들이 잘 모르지만 그가 좋습니다. 사람이 좋습니다. 내년 봄에 결혼할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아직도 방 한 칸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넉넉한 그의 웃음이 좋습니다. 모 정당의 열성 당원인 그는 정치적인 색깔보다는 인간미를 더 짙게 풍깁니다. 거짓이 없어 보입니다. 진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또 좋습니다.

▲ 쓰러진 '청년당원동지'의 깃발은 쌀 개방을 앞둔 농촌의 현실을 닮아 있다.
ⓒ 송성영
그가 좋다보니 그가 세워놓은 깃발을 볼 때마다 내 눈이 아픕니다. 하필이면 화려한 깃발들이 세워져 있는 바로 옆 동네에 그런 깃발들을 세워 그 앞을 오고 갈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벼논 중간에 쓰러지고 비틀려 있는 그의 깃발이 슬프게만 다가옵니다.

요즘 벼 수확에 한창인 '청년당원동지'에게 막걸리라도 몇 통 받아 가야지 하고 있는데 핸드폰 연락이 통 안됩니다. 엄청 바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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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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