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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 교양인
김두식 한동대 법학부 교수가 펴낸 <헌법의 풍경>은 처음 1980년대 잔혹사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88 비디오 극장에서 지금이라면 15세 관람가도 되지 않을 만큼 야한 영화를 본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 교사는 단체 기합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것 봐라? 집단의식을 공고히 하기 위해 누구나 선호하는 (하지만 당사자는 싫어하는) 단체 기합의 부당함으로 인생의 설계까지 바꾼 소년이 있었다.

그는 이렇듯 폭력과 공포로 점철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역사학자가 되려는 꿈을 과감히 접어 버리고는,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판검사가 되면 고통받는 약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최소한 자기가 감옥에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시범 케이스'와 '연대 책임'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법대에 진학해 보니, 이 바닥은 소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국어사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과 외국에서 들여온 (때로는 훔쳐온) 이론들로 중무장한 논문들이 법학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서울대 어느 교수의 '민법 총칙' 교과서에서는 선의와 악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의라 함은 어떤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악의는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작부터 낌새가 심상치 않은 법학, 역시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소년은 괴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덧 그러한 외계어에 익숙해지고 당당히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고백은 여기서부터 놀라운 진실성을 띄게 된다. 그는 사법 시험에 합격하면서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까지 ‘나는 남과 다르다’는 의식에 젖어 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법 연수원에 들어간 뒤부터 걸려 오는 마담뚜 아줌마들의 전화, 주위의 부러운 시선, ‘쓸데없이 튀지 말라’는 암묵적인 강요, 서열과 학연 중심의 법조 문화, 전관예우 관행 등이 특권 의식을 부추기는 주범이었다.

그가 다른 예비 판검사들과 함께 제3사관학교에 입대해 목격한 '귀하신 몸'들의 특권은 더 했다. 술병을 몰래 반입해도, '커닝' 문구를 손바닥에 적어놓아도, 아침 점호에 나가지 않아도, 행군을 하다 택시를 집어타고 집결지로 향해도, 야전삽이 무거워 철 부분을 떼고 막대기만 걸고 다녀도, 모두 무사 제대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더 놀라운 건 교육이 끝난 뒤 바로 이들이(!) 군법무관이 되어, 군대를 이탈하거나 항명한 사람들을 군 교도소로 보냈다는 점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소년은 이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발휘한다.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검사직을 때려 치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내를 외조하며 전업주부의 삶을 택한 것이다. 그러다 '등처가'가 될 것을 염려한 그는 미국의 로스쿨에서 공부한 뒤 자칭 이류 법학자, 타칭 문희만(무늬만) 변호사가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법치국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당성 없는 권위와 폭력이 난무했던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특권 의식에 기대어 법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만든 법조인들을 비판한다.

..법률 전문가들은 우리와 구별되는 뛰어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은 법률가들입니다. 전문가의 탈을 쓴 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모르면 조용히 하라”는 한마디로 모든 비판을 봉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상식적으로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시민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이 쌓여 법에 대한 엄청난 불신의 벽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게 우리가 처한 오늘의 법 현실입니다... (머리말)

또 그는 그릇된 법조 문화 속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권리들도 함께 이야기하는데, 무죄 추정의 원칙이 그 예다. 우리 헌법의 제27조 제4항에는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라는 말이 명시되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실제로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한다.

적어도 우리가 경찰서로 잡혀 온 조직 폭력배들의 문신을 브라운관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한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윗통을 벗길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고 묻는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헌법에서 말하는 ‘유죄 판결’이란 확정된 판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심이나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법원에 항고 중이면 무죄다. 하물며 경찰서로 끌려온 조직 폭력배들은 아직 기소되기도 전인 사람들이다.

수사 기관은 구속 영장을 발부 받아 체포·구속할 권리는 있지만, 웃옷을 벗겨 카메라 앞에 줄 세우거나 방송 매체와의 인터뷰를 강요할 수는 없다. 덧붙여 우리 역시 그들의 문신을 감상할(?) 권리는 없다.


..방송뿐만 아니라 법조계를 포함한 사회 전체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형사재판이 열리는 공판정에 불구속 피고인은 양복을 입고 나타날 수 있지만, 구속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수의를 입고 나타납니다. 아무리 구속 중인 피고인이라 하더라도 법정에 나올 때는 죄수복 대신 양복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다른 나라 법정 풍경과는 무척 다른 모습입니다.

수의를 입은 피고인들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 사람이 유죄라고 판단하게 되고, 피고인들도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주요 사건의 형사재판이 있을 때마다 줄줄이 엮인 채 호송 버스에서 내리는 죄수복의 피고인들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그야말로 법전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242쪽)


이러한 법조계의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그는 ① 미국식 로스쿨 ② 법조 일원화를 통한 사법 구조의 개혁 ③ 배심 제도 등의 도입을 통한 시민 참여의 확대 등의 세 가지 방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 같은 제도의 변화보다 그가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사법시험의 문호가 300명에서 500~1000명까지 늘어난 덕분에 등장하게 된 ‘똥개 법률가들’이다. 그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니고 다양한 진로 개척에 나선 이들 잡종 법률가야말로 주인 잘 섬기고 주제 파악 잘하는 ‘진정한 청지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재치 있고 날카로운 입담과 따뜻하고 솔직한 고백을 통해 그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법조계의 청지기들과, 법을 믿고 신뢰하는 시민이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는 진정한 ‘헌법의 풍경’을 꿈꾼다.

시민들이 더 이상 판검사들 앞에서 굽실대지 않고, 복덕방 아저씨 만나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변호사를 찾을 수 있는, 더 나아가 양심에 따라 총을 들지 않을 권리가 있고, 공산당 할 자유가 허용되는, 무엇보다 ‘서로 받아들임’의 미덕이 통용되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개정증보판

김두식 지음, 교양인(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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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월간 잡지에서 편집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기자로 등록합니다. 제 관심 분야는 주로 문학에 집중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쓸 생각입니다. 딱딱하기보다는 단단한, 쉽고 재미 있으며 삶이 녹아 있는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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