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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사막 중간에 죽어 누운 말. 고비의 가뭄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고비 사막 중간에 죽어 누운 말. 고비의 가뭄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 최성수
오전 여덟 시에 울란바토르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날아 달란자드가드 공항에 도착한다. 그 한 시간 반 내내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산과 사막이다.

그저 막막한 풍경 앞에 마음이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저토록 넓은 땅에 나무 한 그루 없고, 집 한 채 없다니. 아니 나무는 고사하고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은 무인지경의 땅을 바라보노라니 몸이 딱딱하게 굳어 오는 것 같다.

우리가 탄 오십인승 비행기가 고도를 점점 낮추기 시작한다. 착륙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지상으로 내려와도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는 금방 땅에 닿을 듯 내려앉는데, 여전히 활주로는 없다.

활주로도 없이 맨 땅에 내려앉는 비행기. 사막의 품은 이렇게 푹신한 것일까?
활주로도 없이 맨 땅에 내려앉는 비행기. 사막의 품은 이렇게 푹신한 것일까? ⓒ 최성수
덜컹대더니 기체가 약간 흔들리고, 비행기는 달란자드가드 공항에 멈추어 선다. 내리면서 보니 여전히 활주로는 없다. 아니, 활주로가 있기는 있다. 검정색과 노란색을 칠해 놓은 시멘트 덩어리를 띄엄띄엄 늘어놓은 것이 활주로의 전부다. 그저 맨 땅에 비행기는 사뿐히 내려앉은 것이다.

포장된 활주로보다 더 푹신하게 내려앉는 느낌

포장된 활주로보다 더 푹신하게 내려앉는 느낌, 사막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끝없는 지평선뿐이다. 눈이 저절로 아득하게 감긴다.

짐을 챙기고 공항 청사로 들어가는데, 아무 수속도 없다. 그저 짐을 메고 나서면 그뿐이다. 시골 대합실 같은 풍경이다.

시골 기차역 대합실 같은 달란자드가드 공항 청사. 그저 가방을 메고 내리면 검색도 끝이다.
시골 기차역 대합실 같은 달란자드가드 공항 청사. 그저 가방을 메고 내리면 검색도 끝이다. ⓒ 최성수
낡은 버스를 타고 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자, 고비 사막의 쨍쨍한 햇살이 대지를 달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늘에만 들어서면 상쾌하기 그지없다. 습도가 낮은 때문이다. 한동안 겔 앞의 의자에 앉아 눈 닿는 저 끝의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본다. 몽골 사람들은 초원의 아득한 끝에 있는 말과 낙타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다고 하는데, 고비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열 한 시쯤에 욜링암을 향해 떠난다. 욜링암은 독수리 계곡이라는 뜻이다. 사막에 있는 계곡이라는 말에 기대가 부푼다. 버스는 길도 없는 곳을 잘도 찾아 달린다. 그저 차들이 다닌 바퀴 자국이 있어 길이지, 이정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운전기사는 용케 길을 잃지 않고 달려간다.

욜링암 가는 길. 계곡 너머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투명하다.
욜링암 가는 길. 계곡 너머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투명하다. ⓒ 최성수
버스가 달려가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지평선뿐이다. 사막은 모래 언덕이 아니라 황무지다. 드문드문 낮은 풀들이 자라고 있고, 군데군데 말이나 낙타가 풀을 뜯고 있다. 그리고 그 지평선 끝에는 깊이 모르도록 시린 하늘과 몇 점 구름이 떠 있다.

시베리아 평원의 초원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시베리아 초원이 비옥한 풍경의 땅이라면, 고비 사막은 치열한 생존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 초원에는 무진장의 풀들이 자라고, 말이나 양떼들은 그저 느릿느릿 지천의 풀을 뜯어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고비 사막의 평원은 한 줌의 풀도 먼저 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땅이다. 몇 년째 가뭄이 들고, 풀은 점점 말라 사라져가기 때문에 짐승들에게는 한 포기의 풀도 소중하기 그지없다. 풀이 더 있는 곳을 찾아 짐승을 몰고 겔을 옮겨야 하는 고비의 삶은 그래서 아득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달리던 버스가 산기슭으로 접어든다. 욜링암에 가까이 온 것이다. 사막에 이런 골짜기가 있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제법 풀도 많이 자라고, 깎아지른 벼랑 위로 정말 독수리들이 날고 있다. 땅에는 꼬리가 잘린 듯 뭉툭한 쥐들이 돌아다니다 우리를 보고 놀라 굴속을 숨어든다.

골짜기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졸졸졸 냇물도 흐른다. 냇물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뱀도 있다. 냇가에 앉아 발을 담가 보기도 한다. 물이 시리도록 차다. 여름 한 철만 이렇게 물이 흐르고, 나머지 계절에는 얼음이 얼어있다고 한다. 사막 속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 그 생존의 의지가 눈물겨운 것은 저렇게 시린 하늘과 투명한 구름이 함께 있어서일까?

욜링암 여행이야말로 소풍 길 같다. 마침 겔에서 싸 준 도시락을 사막 한 가운데 펼쳐 놓고 먹으며, 나는 문득 내 생의 어느 날엔가 이곳에 한 번 소풍을 온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겔 아주머니가 내 온 음식과 차. 우리네 옛 이웃 사람들의 정겨움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다.
겔 아주머니가 내 온 음식과 차. 우리네 옛 이웃 사람들의 정겨움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다. ⓒ 최성수
돌아오는 길, 한 겔에 방문을 한다. 그러나 겔에는 아무도 없다. 잠시 겔 주위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허겁지겁 아주머니가 나타난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잡아끌고, 먹을 것들을 내온다. 마치 우리네 어린 시절 이웃 집 ‘마실’을 가면 반가이 맞아 주던 동네 아주머니 같다.

수더분한 얼굴에 연신 내온 것들을 먹어보라고 권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그러나 내다 준 치즈 같은 먹을 것들은 시디시어 입맛에 맞지 않는다.

우물에서 물을 푸다가 왔다고 해서 우물을 한 번 보자고 하니까 여기서 아주 멀단다. 아저씨는 안 계시냐고 하자, 도망간 낙타를 찾아 갔단다.

낙타가 왜 도망을 갔느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웃음을 가득 띤 얼굴로 대답한다.

“너무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거든요. 그래서 풀을 찾아 멀리 가버린 거랍니다.”
“그럼 어떻게 찾아올 수 있나요?”
“남편이 말을 타고 찾아 갔어요. 아마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테니 찾아 올 거예요.”

얼마나 멀리 간 것 같으냐니까 가깝다며 대답하는 거리가 한 250km란다.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거리인데, 사막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그저 가까운 거리라니. 그 먼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 낙타를 찾아와야 하는 이 몽골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인적조차 드문 곳에서 가난과 맞닥뜨리며 살아서일까? 그저 사람들만 보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순박한 사막의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 같은 도시인의 삶은 거추장스러운 때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이레쯤 걸려야 돌아올 것이라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주머니의 사막의 밤은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계속 이동하면 외지 나가있는 자식들은 어떻게 찾아오죠?“

그래도 아주머니는 웃으며 자랑스레 입을 연다.

“우리 아들 둘이 울란바토르에 살아요. 큰 아이는 의사고, 작은 아이는 변호사고.”
“겔은 옮겨 다니는데, 아들들이 고향에 오면 어떻게 집을 찾아오나요?”

내가 엉뚱한 질문을 하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전화 받는 시늉을 한다. 전화 연락을 하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동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칭기즈칸의 후예들. 그들에게 우리네 같은 정착민이 갖는 물건이나 땅에 대한 애착은 그저 사막을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덧없는 것일 뿐이리라.

아득하게 사라지는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니 마음이 짠해 온다.

한 겔에 사는 대 가족들. 옹색한 살림이지만 인정만은 푸근하기 그지 없다.
한 겔에 사는 대 가족들. 옹색한 살림이지만 인정만은 푸근하기 그지 없다. ⓒ 최성수
다시 한 군데 겔을 들린다. 운전기사의 친구 집이란다. 이 집은 아까의 아주머니네 집보다 더 가난의 내음이 풍겨난다.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이 한 겔에 모여 산다는 가족들은 말 젖을 발효시켜 요구르트를 만들다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좁은 겔 안에 굳이 들어오라고 하고, 또 아까 먹었던 치즈 같은 것들을 내온다.

가뭄이 들어 풀이 자라지 않아 말 젖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마유주 한 잔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연 그대로인 듯 순박하다.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자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몽골리언, 마치 이웃사촌 같은 모습이다.

그날 밤, 겔에서 나와 바라보는 고비 사막의 밤하늘은 온통 별 천지다. 하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은하수가 붓으로 선을 그은 것처럼 펼쳐져 있다. 저렇게 많은 별이 하늘에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 것 같은 흥분 속에 고비의 밤이 지나간다.

사막으로 난 길. 그저 차가 달려 길이 된다.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막으로 난 길. 그저 차가 달려 길이 된다.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 최성수
아침에 일어나니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른다. 고비의 일출은 순식간에 세상을 환하게 밝히며 시작된다.

오늘의 여행지는 모래사막과 공룡화석 발굴지다.

이정표도 없는 길을 한 없이 달린다. 가다 보니 차창 저편으로 무엇인가 누워 있고, 그 위에 독수리가 앉아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려 보니, 죽은 말의 시체다. 몇 년째 계속되는 잔인한 가뭄이 사막의 풀을 마르게 하고, 그 풀을 먹고 사는 짐승들을 죽게 만든다. 황폐화되어 가는 고비 사막의 모습을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릿해 진다.

한때는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나라, 그들은 바람처럼 말을 달려 세상을 정복한 민족이었다. 칭기즈칸의 군대가 세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날랜 말과 보급이 필요 없는 이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말에 매단 주머니에 말린 소 한 마리를 넣어 다녔다고 한다(소를 잡아 육포를 만들고, 이 육포를 말려 만든 가루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말에 매달고 다니면서 식사대용으로 썼다). 이동의 습관이 몸에 밴 칭기즈칸의 군대에게 정착의 삶에 길들여진 세상은 얼마나 손쉬운 상대였을까?

그러나 이제 그 용맹하던 칭기즈칸들은 황폐화된 사막의 모래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는 그저 말라가는 풀들 때문에 고통 받는 가난한 후예들만 살고 있을 뿐이다. 바람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바람으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새삼 역사란 무엇인지,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고비의 모래 사막. 시린 하늘과 바람에 모래 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
고비의 모래 사막. 시린 하늘과 바람에 모래 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 ⓒ 최성수
모래 언덕에 이르자,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모래 쓸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디디며 올라간 발자국은 모래 바람에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곳. 그 모래 언덕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저 모래처럼, 아니 내가 달려온 황막한 사막의 말라가는 풀들처럼, 내가 살다 갈 이승의 삶이란 그렇게 미미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아등바등 다투고 주장하며 내가 내 이웃들에게 준 상처가 나는 문득 미안해 졌다.

공룡 화석 발굴지. 마치 옛 성을 보는 듯하다.
공룡 화석 발굴지. 마치 옛 성을 보는 듯하다. ⓒ 최성수
사막은 인간 존재의 시원을 고민하게 하는 곳인지도…

공룡 화석 발굴지의 그 스러지는 시간과 햇살 속에서도 나는 덧없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사막은 인간 존재의 시원을 고민하게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저 거대하고 너른 사막에 눈 씻고 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온갖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주라는 너른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극히 미미한 생명체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 사막의 척박함 속에서 생명을 지탱해 가며 한 생을 살아가는 풀과 벌레들처럼, 나도 또한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 그 둘의 거리 속에서 나는 고비 여행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고비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별빛은 더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낮에 잠시 후드득 지나갔던 빗줄기 덕에 풀들도 깨어 저 별빛에 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겔 밖에 나와 온갖 상념에 잠긴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보이던 신기루와, 끌고 가는 사람도 없는데 풀을 찾아 줄을 서서 한없이 지평선으로 사라지던 낙타떼와, 밤에 뜬 달이 다음 날 한낮이 되었는데도 겨우 하늘 가운데에 와 있을 정도로 둥글고 너른 사막의 하늘과, 욜링암 가는 사막의 박물관에 피어 있던 금잔화와 버스 옆에서 꼬리를 파닥이며 도망가던 도마뱀,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환영처럼 바라보는 건조해진 나의 의식의 끈들.

그 끈을 놓아 버리자 아득한 꿈에 잠겨든다. 뒤척임 가득한 고비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나의 여행도 끝이 난다.

울란바토르로 돌아오고, 테를지를 거쳐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초원과 사막이라는 두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야생화 가득 피어 짧은 한 여름을 견뎌내던 바이칼의 초원과, 말라 시들어가는 풀들을 찾아 하염없이 떠돌아야하는 고비 사막의 거리, 그 거리는 어쩌면 내가 일생동안 살아가야 할 현실과 꿈의 거리쯤 되지 않을까?

끌고 가는 사람도 없이 풀을 찾아 사막을 흘러가는 낙타 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세상의 사막을 떠도는 낙타 같은 것은 아닐까?
끌고 가는 사람도 없이 풀을 찾아 사막을 흘러가는 낙타 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세상의 사막을 떠도는 낙타 같은 것은 아닐까?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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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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