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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로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국보법 폐지에 대한 기고문을 받고 있다. 전 국가인권위원이고, 소설가인 유시춘씨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국가보안법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는 늘 불이 붙는다.

다른 무엇보다 이 법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조직과 구성, 그리고 그 작용에 대한 근본이 되는 법으로 그 하위의 그 어떤 법률로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가치와 이념을 천명한 최고법규인 헌법을 짓밟고 그 위에 버젓이 서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험악하고도 고약한 발톱에서 풀려난 지 얼마되지 않은 날에 신생 대한민국은 비록 그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지만 국가의 이상을 명확히 규정한 자랑스러운 헌법을 가지게 되었다. 탐학한 집권자가 오로지 장기집권을 위해 6번씩이나 누더기로 만든 조항을 빼면 헌법은 대체로 제정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10조)’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 압수, 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12조),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21조)


이렇게 정의롭고 아름다운 헌법의 가치를 국보법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반세기 넘도록 의심없이 주저없이 망설임없이 위풍당당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거칠 것없이 유린했다. 이미 필자가 복무한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보법폐지의 근거를 조목조목 들어 권고한 바 있으므로 굳이 재차 이런 글을 쓰는 게 사족인 줄 알면서도 국가인권위원이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양심 때문에 쓰고자 한다.

‘양심’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고야 말 것같은 진실하고 강력한 마음의 소리’이므로 국가나 제도가 강요할 수 없는, 하늘이 주신 불가침의 인권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개성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헌법도 당연히 이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국보법은 드라큘라...누구든 그의 먹이감이 될 수 있다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 국가보안법이 정치를 비롯한 특별한 일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일로 여겨서 이에 무관심한 국민들에게 나는 호소한다. 그들도 모두 천부의 양심을 가졌기를 바라면서.

물론 국민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의 결과로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성숙되어가고 있는 이즈음에는 국보법의 적용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했고 국보법으로 인한 수사과정의 인권침해 논란 역시 괄목할 수준으로 소멸되었다. 예전처럼 북어 패듯 패대기를 치고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만신창이를 만들어 억지자백을 받아내다가는 그 즉시 목이 날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자는 것은 드라큘라가 잠들어 활동을 중지했으니 그 관에 못을 박아 태워버리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주장과 동일하다. 나는 감히 국보법을 서슴없이 드라큘라에 비유한다. 누군가의 피를 묻혀야 생존할 수 있으며, 언제 누구든간에 그의 먹이감이 될 수 있다.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를 부정하고, 38선 이북의 동족 전체를 적으로 설정하고 분노와 적개심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지 아니한 일면만 보여도 국보법은 야차같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때려잡아야만 생존하는 사람은 영혼이 없거나 병든자이다.

나는 제안한다. 제발 과거사 진상규명위가 출범해서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친북 용공자혐의를 받은 이들까지 몽땅 명명백백하게 밝혀 줄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진이들에게 어떤 절차를 통해 단죄가 이루어졌는지 모두 규명해 주기를 자신있게 주장한다.

"너 우리한테 대들어...'국보' 한사발 먹어볼래"

또하나, 국보법50년 적용사를 뒤집어 놓으면 곧바로 우리의 피어린 ‘민주화운동지혈사’가 되지만 국제사회의 조롱거리이던 유신과 5공시대에는 정치와 무관한 장안의 선남선녀들까지 무사하지 못했다. 이 말을 상기해보자.

“처음에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체포하러 왔을 때 우리는 부당한 줄 아면서도 침묵했다. 왜냐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다음에 유태인을 잡으로 왔을 때도, 그 다음에 노동운동가를 잡으러 왔을 때도 그랬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태인도 노동운동가도 아니었으므로. 또 다음으로 기독교인과 자유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그 때는 막상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치즘이 발호할 즈음의 한 지식인의 독백이다.

나는 국보법의 위험성을 말하고자한다. 그 정치적 남용과 오용은 이 법이 제정당시부터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던 강력하고 다급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구성요건의 개념이 불명확하며 광범하고 추상적인 것에서 비롯하였다.

5공이 국보법으로 입건한 이들이 2천명이 넘는데도 국가안위가 무너졌는가. 오히려 민주화의 도정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이룬 6월 항쟁을 완수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전진해 오지 않았는가. 이는 바로 국보법이 사실상 권위주의적 정권을 향한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독재자에게 백지위임한 형법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어체로 이야기하자.

'나는 네가 하는 일이 졸나 맘에 안들어. 감히 어디라고 우리한테 대들어. 너 국보 한 사발 마셔볼래?’

국보법이면 딱 패가망신한다. 독재자의 심기가 뒤틀리거나 조금이라도 저항의 기미가 있는 집단을 일거에 제압해야할 필요 때문에 인혁당처럼 대법판결 하루도 지나기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하고 전두환처럼 미국의 승인을 받기위한 행차 때문에 김대중의 사형이 무기로 감해지기도 한다.

김대중은 집권에 성공, 재심을 거쳐 무죄를 확정했지만 이미 하늘에 계신 분들은 어이할까? 국가보안법은 시민적 정치적 자유와 권리뿐만아니라 언론, 출판, 문학, 학문, 예술, 교육, 종교,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걸쳐 실로 전방위로 활약하였다. 이도 부족해 갑남을녀가 한잔 술에 권커니자커니 하다가 ‘사실은 김일성 머리에는 뿔이 없대드라. 거기도 사람사는 세상인가 보더만’어쩌구하다가 철창신세지고 망가진 이들이 허다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막걸리 국가보안법’이다.

85년 이후 민가협 총무시절에 숱하게 국보법의 법정에 갔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한나라당의 김문수 의원이다. 당시 그는 정치적 노동운동의 선풍을 일으킨 ‘서노련’사건으로 구속중이었다. 그는 무려 3시간에 걸쳐 공소장의 서두에 붕어빵처럼 똑같이 찍혀 있는 ‘…한 것이 북괴를 이롭게 하는 줄 알면서’라는 구절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 노동자의 무권리상태를 극복하는 노동운동이 북괴하고 무슨 상관이람. 그는 실로 집요하게 검사와 싸웠다.

북괴가 무얼 주장하는지 나는 모르는데 무슨 근거로 공소의 각 장 내용마다 갖다 붙이는 거냐는 주장은 장시간 반복되었다. 빼어나고 대단한 기개였다. 그런 그가 그 무슨 심오한 뜻으로 국보법 존치에 올인하는 정당의 핵심으로 있는지 천학비재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로되 지금이라도 그 때의 의기와 올바른 판단을 회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민주화운동으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었던 이재오 의원 역시 그렇다. ‘모리스 돕’의 책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읽었다고 해서 민청련의장 김근태와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기자가 다른 미운털을 뒤집어쓰고 국보법으로 기소된 건 어떤가. 이루다 열거할 수가 없다. 그나마 기록으로라도 남아있는 사건은 박원순의 저서 <국가보안법>에 낱낱이 엮어두었으니 모쪼록 일독해 보시기를. 납북어부, 재일동포들은 승진에 눈이 뒤집힌 안기부 등 수사기관의 실적야욕 때문에 생긴 일이다.

70일간 고문당하면 마르크스도 독일간첩이 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내가 더러 만나 이런 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A가 있는데 어느날 밤에 영장도 없이 나를 잡아가두더니 그가 친북인사 내지는 간첩이라고 수사기관이 말한다. A는 어디갔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나는 무슨 재주로 A가 간첩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70일간 잠못자고 두드려맞고 고문당하면 ‘마르크스도 독일간첩이 될 수 있다'. 헌법에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 영장없이 체포되거나 고문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모든 국보법위반자는 위헌 행위를 한 셈이다. 이건 영락없이 헌재에 위헌제청을 해야할 사항이다.

1950년 2월 ‘우리 미국 국무부 직원중에 이백 여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라는 제 일성으로 시작한 극우반공주의자 매카시 상원의원의 발언은 문명사회 미국을 하루아침에 야만과 공포와 광기가 난무하는 지옥으로 밀어넣었다. 33개주가 빨갱이사냥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가 하면 연방정부는 삼백 만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머릿속을 검증했다. 인디애나주에서는 부자로부터 불의한 재산을 빼앗아 민초들에게 나누어 준 전설의 주인공 로빈훗까지 매도하기에 이른다.

기업인, 교수, 군장성, 헐리우드의 스타들까지 이 미친 바람에 시달려야 했다. 반매카시즘 알레고리 영화로 유명한 <하이눈>의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은 이 광풍이 몰아치자 잠시 망명했다가 63년에 귀국한다. 그는 자신을 ‘인간양심을 믿는 자유주의자’라고 말했다.

가상의 적을 향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뭉친 이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데 미국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자유를 신봉하는 지성들이 60년대 후반부터 일대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몹쓸 질병은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제3세계에 전염되었다.

반공광신도 매카시가 ‘이 안에 공산주의자의 명단이 있소’라고 외치며 뒤흔든 가방 속에는 정녕 무엇이 있었던가. 후일 밝혀졌지만 그것은 빈 가방이었다.

매카시, 빈가방 흔들며 "이 안에 공산주의자 명단 있소"

지구상 최고의 부자나라요, 외교정책은 몰라도 자국의 민주적 가치관을 지키는데는 눈물겹도록 충실한 문명사회인 미국이 십여년간 빠져들었던 이 소용돌이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탕진 한 후 진정되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일각의 경향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수구세력들이 언론 개혁을 비롯해 구질서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개혁하려는 의제가 나올 때마다 색깔론을 들먹이는 것은 아직도 그들이 매카시즘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말로 전가의 보도요, 가장 손쉽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국민을 대규모 기아에 허덕이게 하는 가난하고 낙후한 체제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적이 될 능력이 없다. 다만 우리가 도와주고 업고 가야할 모자라는 아우와 같은 존재이다. 부부는 싫어지면 헤어질 수 있지만 형제는 그럴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 국민의 어느 누구도 완전한 인격이 되기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국민이 포악한 독재자라도 만날라치면 당신은 조심 조심, 거듭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의 눈밖에 나면 언제라도 살인혐의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손가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당신은 북한 주민이 즐겨쓰는 동무라는 말을 아주 다정한 어감의 아름다운 우리말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래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내 한몸, 내가족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오지랖 넓게 우리사회의 건강한 발전이나 하물며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그 위험이 크다.

5공 때 필화에 연루되어 수사기관에서 당한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7년여 시달리고난 뒤 앓다가 돌아가신 빼어난 서정시인이 있다. 그이는 하늘로 돌아가기 직전에 시 한편 남겼다.

“나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한간방 없어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 댓자로 들을 참이네“


이리 고운 이들을 갖가지 악행으로 고문한 자들을 상상해 보라. 어찌 국보법이 드라큘라가 아니겠는가. 생존하는 한 아흔아홉마리 양이 무사해도 한 마리 양은 피흘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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