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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 고혜정 <친정엄마> 마산문화문고
ⓒ 도서출판 함께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힘들 때 왜 날 낳았냐고 원망해서 미안해.
엄마 새끼보다 내 새끼가 더 예쁘다고 말해서 미안해.
언제나 외롭게 해서 미안해.
늘 나 힘든 것만 말해서 미안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자주 못 보여줘서 미안해.
늘 내가 먼저 전화 끊어서 미안해.
친정에 가서도 엄마랑 안 자고 남편이랑 자서 미안해.
엄마의 허리 디스크를 보고만 있어서 미안해.
괜찮다는 엄마 말 100퍼센트 믿어서 미안해.
엄마한테 곱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잘나서 행복한 줄 알아서 미안해.
늘 미안한 것 투성이지만 제일제일 미안한 건
엄마,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엄마가 아니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24~25쪽, '엄마 미안해' 모두


방송작가 고혜정(36)이 자신을 낳아 길러준 친정엄마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끝없이 이어지는 친정엄마의 따스한 사랑을 꼼꼼하게 뜨개질 한 생활에세이 <친정엄마(도서출판 함께)>를 펴냈다.

'신은 모든 딸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친정엄마를 보내셨다'라는 덧글이 붙어있는 이 책은 '우리 엄마가 사는 이유'로 첫 꼭지를 연 뒤 '집 떠나는 딸', '엄마 때문에 못살아', '사위를 울려버린 엄마', '주민 여러분, 63빌딩에 가면', '모지래기 엄마의 이모 생각'을 포함 모두 15꼭지의 글을 싣고 있다.

"'아들네 집에 가서는 앉아서 밥상을 받고 딸네 집에 가서는 손수 밥상을 차려 딸 앞에 대령한다'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딸네 집에 놀러와서도 이불빨래며, 대청소에 쉴 새 없이 바쁜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식탁의자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주방 싱크대 앞에서 물 말아 밥 한술 후루룩 드시고 다시 걸레를 드십니다." -'여는글' 몇 토막

고혜정은 '여는글'에서 "시집 간 딸들에게 친정엄마처럼 애틋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소중한 친정엄마에게 그 마음표현 한번 속 시원하게 해본 딸이 과연 있을까?"라며 물음표 하나를 툭 던진다. 그리고 시집을 간 딸과 그 딸을 멀찌감치 서서 애타게 지켜보는 친정엄마는 그저 마음으로 통한다고 스스로 답한다.

이어 첫아이를 낳으면서 "아, 우리 엄마도 나 낳을 때 이렇게 힘드셨구나!" 하며, 친정엄마의 깊은 속내를 빠꼼히 엿본다. 그때부터 글쓴이는 "애를 키우면서 조금씩 엄마의 마음(애기 같았던 딸이 시집을 가서 살림살이에 부대끼며 애를 키우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보는)을 알게 되어 혼자 눈시울을 적신 적"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까. 생각하면 참 코미디처럼 웃기는 일인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도 아버지는 엄마를 때렸고 우리는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소리 없이 맞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아버지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애들 배고프겄소, 밥 좀 챙겨주고 헙시다."

그러자 아버지도 순순히 엄마의 말을 따랐다./ 엄마는 기다시피 부엌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밥상을 차려서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어서 먹으라고 하고는 다시 아까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때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울면서 그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으면 제대로 된 코미디가 됐을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그 상황에서…….

-10쪽, '우리 엄마가 사는 이유' 몇 토막


그날,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너무 화가 나서 밥상을 냅다 엎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대든다. "죽여, 죽여. 아예 죽이라고! 그렇게 엄마 골병들어서 죽게 하지 말고 한번에 죽여, 제발…. 엄마도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죽어, 제발. 엄마 죽어!"라며….

근데 아버지는 엄마를 그렇게 마구 때리면서도 자식들한테는 손찌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아버지는 사실 "엄마를 때릴 때 외에는 너무 좋은 가장"이고 훌륭한 아버지라고. 그리고 주변에서 호인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아버지가 그때 왜 그토록 엄마를 때렸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방송작가 고혜정은 누구인가?
3남1녀의 장녀, 공채 합격

▲ 고혜정
ⓒ도서출판 함께
"처음엔 끝까지 숨기려고 했다. 그리고 책이 나온 다음에 그 책을 맨 먼저 가지고 찾아가서 엄마 앞에 내놓으며 얘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엄마와 나는 자주 통화를 하고 시시콜콜 얘기하다보니 그만 입이 근질거려서 통화중에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엄마 얘기를 써서 책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아무 소리가 없다. 내가 전화기 너머로 엄마를 몇 번 부르자 엄마가 목이 메어 말씀하신다.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디, 늘 너한테는 부족한 엄마였는데, 그리서 내가 너를 낳은 것을 너무나 미안해 험서 살았는디…. 너는 엄마가 챙피시럽지도 않냐?" -'닫는글' 몇 토막


방송작가 고혜정은 1968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공채에 합격하면서 방송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3남1녀의 장녀이자 외동딸인 작가는 "세상에 한 분밖에 없는 친정엄마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늘 싸우며, 다투며, 의지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다"며 "친정엄마에게 낙천성과 유머감각을 물려 받았기에 오늘도 웃으며 살고 있는 행복한 딸"이라고 밝혔다.
/ 이종찬 기자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또 엄마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입술이 터져 멍이 들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채 훌쩍이며 또 쌀을 씻고 있다. 그런 불쌍한 엄마를 보다 못한 '나'는 말한다. "이혼해, 아니면 서울로 도망가서 식모살이라도 허든지. 왜 맨날 이렇게 맞고만 살어"라고….

그때 엄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너 땜시… 너 땜시 이러고 산다"고 말한다. '나'가 "왜? 왜 나 땜시?"라고 묻자 엄마는 "내가 없으믄 니가 고생이여. 엄마가 허던 일 니가 다 히야 헐 것 아녀? 밥허고, 빨래허고, 동생들 치닥거리허고…핵교도 지대로 갈랑가도 모르고…."

1990년, MBC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난리가 났다. 내가 뭘하는지는 모르지만 방송국에 들어갔다는 자체가 시골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이었고, 우리 부모에게 자식 잘 키웠다고 모두 부러워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가자 학교 다닐 때 '가정환경조사서' 같은 서류를 주며 작성하라고 했다.

부모 이름, 가족관계, 본적, 최종학력… 뭐 이런 것들을 적었던 거 같다./ 그런데 그때 주위 동료들로부터 조금 놀림을 받았다. 우리 부모님의 이름이 너무 특이하다고. 엄마의 이름은 내가 봐도 좀 특이하고 촌스러웠다./ 우리 엄마의 이름은 '노진예'다./ 아무리 창피하다고 엄마의 이름을 거짓으로 쓸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또 그게 뭐 그리 창피하고 기죽을 일도 아니고.

그리고 몇 주 후 집에 내려갔을 때, 집안 식구들이 방송국 생활을 물었다. 동생들은 연예인 스캔들이 사실인지를 물었고, 아버지는 최불암이랑 김혜자 봤냐고 했고, 엄마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만큼 대답했고, 다들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가 건성으로 한마디 덧붙힌 게 탈이었다.

"나 엄마 땜에 챙피해서 죽을 뻔했네."
"왜야?"
"엄마는 이름이 노진예가 뭐야, 챙피하게. 다른 사람들 엄마 이름은 복희, 선화… 뭐 그런 건데. 노진예, 그거 쓰는데 진짜 챙피하더라."

-77~79쪽, '우리 엄마 이름은' 몇 토막


그 다음날 엄마는 아침 일찍 '나'를 깨운다. 그리고 "야, 너 얼른 올라가라"며 '나'의 등을 떠민다. "왜?" 라고 묻자 엄마는 "너, 내 이름 땜시 챙피혔다고 혔제? 너 얼른 방송국에 가서 그 서류 찾어서 엄마 이름 고쳐라"라고 말한다. "괜찮어"라고 하자 엄마는 간밤에 이름을 좋게 지었다며 어서 고쳐라고 재촉한다.

'나'가 "뭐라고 지었는데"라고 엄마에게 묻자 엄마는 "내가 이놈저놈 다 생각히봤는디 그 이름이 젤로 고치기 좋겠어. 방송국 가서 그 서류 찾어다가 노진예에서 'ㄴ'자만 침 발라서 싹싹 지워버리라. 그믄 노진예가 아니라 노지예, 좋잖냐?"라며 빨리 서울로 올라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나'는 방송국에 와서도 엄마의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기의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딸이 창피당하는 게 마음 아파 이름까지 바꿀 궁리"까지 한 엄마의 그런 속내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후회를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부터 늘 '노지예'란 이름을 쓴다.

그 날도 우리는 친정에 놀러갔다가 반찬이며 먹을거리를 차에 잔뜩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남편이 나에게 뭔가를 찔러줬다.

"뭐야?"

접고접고 또 접은 돈 7만 원이었다./ 출발 전 엄마가 남편을 뒤꼍으로 불러가 가보니 눈물을 글썽이며 이걸 주더란다.

"나이 들어서 공부허기도 힘들 텐디, 마누라 눈치봄서 돈 타 쓰기도 미안허제? 이놈 갖고 가서 담배 사 펴. 내가 돈 십만 원이라도 채워서 주믄 좋을 것인디, 아무리 노력을 히도 못 채웠네. 미안허네."

엄마는 수입이 없었다. 우리가 조금씩 보내는 용돈으로 생활하려니 엄마도 빠듯할 텐데….

-118쪽, '사위를 울려버린 엄마' 몇 토막


'나'는 너무도 속이 상해 울면서 남편에게 소리를 꽥 지른다. 그리고 남편에게 "왜 받아왔느냐고, 우리가 엄마한테 용돈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왜 받아왔냐고. 엄마의 전 재산을 다 받아오니 속이 시원하냐고, 막 억지소리"를 한다. 그때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던 남편이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마구 흐느껴 운다.

남편은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다고, 딸 고생시킨다고 미워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처음엔 사양했지만 나중에는 고마워서 받았다고, 진심으로 아들한테 하듯이 딸 눈치 보며 돈 타 쓰는 자신을 안쓰러워하며 주시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받았다고" 라며 엉엉 운다.

"엄마, 나는 엄마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엄마 딸이라는 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역 니은이나 구구단을 가르쳐주진 못했지만 전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컸습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니 상장을 받을 일도 없었겠지요. 그런 엄마에게 못난 딸이 이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방 한가운데 제 상장을 붙혀놓고 사람들에게 자랑했듯이 저도 이 책을 통해 엄마를 자랑하렵니다." -'닫는글' 몇 토막

방송작가 고혜정의 <친정엄마>는 이 땅에서 딸을 낳아 키우며 살아가는 모든 어머니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잘 익어가는 대추처럼 알알이 열려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몽땅 다 딸에게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쓰러워하는 친정엄마, 그 친정엄마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딸들의 마음을 휘저어가는 나룻배다.

친정 엄마 - 증보2판

고혜정 지음, 나남출판(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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