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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 장재성과 그의 서훈 취소결정을 보도한 1962년 3월 1일(석간) <동아일보> 3면 기사. <동아일보>는 당시 "알려진 바로는 장씨에 대한 취소는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때문이라고 한다"고 보도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 장재성과 그의 서훈 취소결정을 보도한 1962년 3월 1일(석간) <동아일보> 3면 기사. <동아일보>는 당시 "알려진 바로는 장씨에 대한 취소는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때문이라고 한다"고 보도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일제하 항일 독립운동을 하고서도 해방후 이데올로기 문제로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포상이 보류 내지 취소된 인물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장재성(張載性·1908∼1950)을 들 수 있다. 그는 일제하 항일학생운동의 상징적 사건인 이른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다.

도쿄 중앙대학 예과에 유학중이던 장재성은 1929년 6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사범학교, 광주농업학교 등 학내 비밀조직인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를 맡으면서 광주학생의거를 전면에서 주도하게 된다.

'장재성 빵집' 운영하며 비밀모임 주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인 장재성은 '독서회' 활동을 위해 '장재성 빵집'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서는 동지 김기권이 문방구점을 개설해 운영하면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학생운동을 촉발 시킨 1929년 11월 3일 오전 시위를 마친 이후 장재성은 '광주고보생 학생총회'를 개최,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를 습격하자는 학생들을 향해 "우리의 적은 일본인 중학생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일제 식민지정책과 노예교육"이라고 설득하면서 일선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또 신간회 광주지회 간부 장석천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해 '광주 조선인 학생의 지도'를 담당하기도 했다.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시위는 이 지도본부를 바탕으로 전국적 운동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기홍 유고집·<광주학생운동독립사>)
이에 앞서 1926년 11월 3일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지역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조직 '성진회(醒進會)'는 1928년 동맹휴학 등을 주도했는데 이는 '독서회'의 전신이었다. 이 두 단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바로 그 중심에 장재성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장재성은 1930년 2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예심판결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7년형을 구형받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독서회-성진회 사건 병합심리 복심판결에서 기소된 85명 중 가장 무거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그가 이 사건의 핵심인물임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최승호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상임부회장은 "이념적 잣대가 빚은 결과"라고 잘라 말했다. 배종국(42년 광주서중 무등회 사건) 동지회 부회장은 "좌파운동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독립운동이 폄하돼서는 안된다"며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포상이 안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민주당 땐 서훈 대상...군사정부선 서훈 취소

그에 대한 국가차원의 포상 노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는 장재성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5·16후인 1962년 3월 1일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주무부처인 내각사무처는 장재성에 대한 국민장(3등급, 현 독립장) 서훈을 취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시 내각사무처는 장재성에 대한 신원조회 결과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 활약하다가 1948년 2월 월북, 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가 남파한 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복역중 6·25 후퇴시 피살된 사실이 밝혀졌다"며 서훈취소 이유를 밝혔다.(<바로잡아야할 우리 역사 37장면1>·역사문제연구소)

당시 <동아일보> 1962년 3월 1일(석간)자 보도에 따르면, 내각사무처 공적심사위원회는 포상 하루 전인 2월 28일 회의를 갖고 서훈취소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똑 같은 사안을 두고 정권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를 내렸고, 또 포상에 대한 잣대에 차이가 있어 왔다는 점이다.

최승호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상임부회장은 "과거에는 이런 문제를 언급하는 자체를 금기처럼 여겨왔는데, 이제 과거사 청산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이런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며 "그의 자제가 전남 강진에 살고 있는데 심리적 압박감 때문으로 외부와 접촉도 끊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장재성씨와 함께 광주학생의거에 참가했던 강해석, 이기홍(당시 광주고보), 이영백(광주사범학교), 이영범(광주농업학교), 이용근(광주농업학교) 등도 최근 국가보훈처가 공개한 <좌익보류 서훈 보류자 명단>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강해석은 성진회와 독서회 활동을 지도했던 인물로, 고려공산청년회 당원으로 광주청년동맹·신간회 광주지부 간부로 활동했다. 이기홍은 자신의 유고집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에서 "광주의 학생 청년운동은 책임자인 지용수·강해석의 지도하에 1926년 광주의 각 학교 애국학생을 망라한 성진회로 조직되었다"며 강해석의 역할에 대해 밝힌 바 있다.

1931년 6월 14일자 <동아일보> 2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성진회-독서회 병합심리 복심판결'과 관련 85명에 대한 판결내용을 보도했다. 장재성은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6월 14일자 <동아일보> 2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성진회-독서회 병합심리 복심판결'과 관련 85명에 대한 판결내용을 보도했다. 장재성은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강해석은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으로 두 차례의 구속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기홍(1912∼1996)은 29년 학생독립운동에 참여, 퇴학당한 이후 고향 완도에서 농민운동,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해방이후에는 건준위 광주시위원, 사회대중당 활동 때문에 모두 3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이기홍은 생전에 몇 차례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지만 실정법 위반 전력, 사회주의운동 전력으로 번번이 탈락했다. 이기홍의 딸 이경순(전남대 영문과 교수)씨는 "인민위원회와 건준 활동, 정당활동 등으로 구속 수감된 전력 때문인 것 같다"고 밝히고는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올 연말까지 좌파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심사기준 가운데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부분을 개선, 자료분석팀을 구성해 종합적인 자료 수집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원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재평가'에 대해 "우선은 포상과 관련해 자료가 충분치 못한 분들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집하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건국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포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황 과장은 이어 "건국훈장 포장과 표창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서 포상을 하는 것인 만큼 해방전후의 활동이 건국 과정에 해를 끼친 분들은 포상하기는 어렵다"면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규명하고 포상할 분들은 포상하고 포상이 안되는 분들은 자료로서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밝혔다.

'건국에 위해를 가했다'는 기준에 대해서는 "이 부분은 어디까지를 위해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와 관련 단체 등의 자문을 구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며 "2005년에는 새로 마련될 심사기준으로 심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원칙적으로 독립에 기여한 분이면 이념에 관계없이 포상해야 한다"고 전제, "해방 이후 대립문제는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해방 이후에 대한 것은 다른 형태의 숙제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회적 합의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95년, 이동휘 등 일부 포상... 보훈처, 서훈 보류자 명단 113명 공개

한편 국가보훈처는 최근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사회주의 계열 서훈 보류자 150여 명 가운데 1차로 113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명단에는 여운형, 권오설, 김재봉, 조동호 등이 포함돼 있으나 조봉암, 김시현, 장재성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1142명에게 대규모 포상을 실시한 바 있는데 이 때 임정 국무총리 출신으로 1921년 고려공산당 결성을 이유로 그간 포상이 보류됐던 이동휘(1873∼1935) 등 일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해 포상한 바 있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의 첫 시발점인 셈이다.

최근 노 대통령의 발언 이후 국가보훈처는 그간 공개 자체도 꺼려왔던 '좌익계열 서훈보류자 명단'을 공개하고, 심사기준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는 전체 독립유공자 규모를 3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2004년 8월 현재 9528명을 포상한 바 있다.

왕재일, 장재성 등 15명의 광주지역 학생들이 비밀결사조직 '성진회' 결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결성되었다.
왕재일, 장재성 등 15명의 광주지역 학생들이 비밀결사조직 '성진회' 결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결성되었다. ⓒ 광주학생운동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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