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록도의 납골당 만령당에는 1만308위가 봉안돼 있다
소록도의 납골당 만령당에는 1만308위가 봉안돼 있다 ⓒ 인권위 김윤섭
나환자들의 울분과 탄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5년에 건립한 신사를 지나 제2안내소로 들어서면 노란 표지판이 길을 가로막고 선다. '수탄장(愁嘆場)'.

"이곳은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는 경계선으로 병원에서는 전염병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보육소에 격리하여 생활하게 하였으며, 병사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선 도로에서 한 달에 단 한 번 면회가 허용되었다. 이때 미감아동과 부모는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다."

소록도는 신사에 이어 수탄장, 검시실, 감금실에 이르기까지 단 한 곳도 평화로운 곳이 없다. 내딛는 걸음마다 탄식이 배어든다. 죄명이 문둥이어서 자신의 죄를 변호할 길마저 없고, 문둥이라는 이유 하나로 세상의 욕이 되고, 벌이 된다.

자고 나면 손가락 한 매듭이 사라지고, 자고 나면 발가락 하나가 없어지는, 성서에 기적의 이름으로 자주 나오는 문둥병은 나병이라고도 부르고, 한센병(Hansen's disease)이라고도 부른다.

노르웨이 의사 A.G.H.한센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결핵균 비슷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뒤 붙인 병명으로, 말초신경과 피부에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에 침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창기 때 나병은 본인이 걸리고도 알지 못하는 병이었다.

소록도에서 원생자치회장과 인권회복추진위원장 직함을 갖고 있는 김명호(55)씨도 그랬다. 몰라서 3년, 알고 나서 3년, 썩어서 3년이라는 소록도의 은어처럼 쫓겨나고 버림받은 기억들뿐이다.

"나도 처음에는 결혼해서 마누라하고 잘 살았지. 그런데 언젠부턴가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더라고. 손으로 만져 봐도 내 피부가 아닌 것 같고. 그러니 무슨 수로 부부로 살 수 있겠나. 그 길로 이혼하고 산으로 들어가 천막 치고 살았지 뭐. 어머니가 식량하고 반찬을 가져오면 그것으로 목숨을 연명하면서 말이야."

경북 김천이 고향인 김명호씨는 그 당시 나병에 대해서도, 소록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지은 죄도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내쫓기고 그는 아들마저 잃어야 했다. 그나마 큰형님 호적에 아들이 양자로 올라가 있는 김명호씨는 다른 나환자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만큼 자식을 둔 소록도 나환자들의 마음고생은, 소록도병원 김중원 원장의 몇 마디에서 보이듯 절규 그 자체였다.

"이따금씩 자녀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혼이 임박하면 발길을 뚝 끊어 버리거든요. 부모님 병 때문에 쉬쉬하고들 살아가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나중에라도 부모님의 병세를 알게 되면 이혼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할까요. 그래서 자녀들보다는 나환자 본인들이 더 세상에 공개되는 걸 꺼려하는 편입니다."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갖 소외와 핍박 속에서 살아온 나환자들은 고집이 세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유전과는 거리가 먼 병을 갖고 있음에도 정작 이들은 입을 다물고 몸을 숨겨버린다.

암으로 인한 사망률과 비교해 보면 한센병은 그야말로 전국을 통틀어 한 해 발병률이 15∼17명이 고작인데도 굳을 대로 굳어 버린 세상의 인식을 뚫고 나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한 나환자의 이야기다.

"손가락이 없고 발가락이 없다 뿐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닳아지고 없을까. 아무려면 나병이 암보다 더 무서울까. 암은 유전이 가능하지만 나병은 그렇지 않거든. 감염만 해도 그래. 아주 극소수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의사, 어느 간호사가 그것도 몇 십년씩 이곳에 붙어 있기나 하겠나?"

소록도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순전히 예배 때문이다. 세상 교회들은 5시에 새벽예배를 시작하지만 'S도'(나환자들은 섬 밖의 사람들이 사는 곳을 '사회'라고 하며 자신들이 사는 곳은 소록도의 영문 첫 자를 따서 'S도'라고 부른다)는 4시에 새벽예배를 드린다. 그러고 나면 할 일이 없는지라 아침식사는 6시, 점심은 11시, 저녁식사는 4시에 마친다. 더욱이 고령화(평균연령 78세)로 접어들다 보니 소록도는 저녁 8시면 한밤중이다.

현재 소록도에 살고 있는 나환자들 대부분은 한센병보다는 노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더 많다. 그중 건강이 좋은 환자들은 재활 차원에서 잡초제거와 보수공사, 관리, 청소를 해주고 월 20만∼30만원의 급여를 받기도 하나 소수에 불과하다.

삶도 욕망도 모두 가둬두고 살아야 한다

부인과 사별후 얼마전 소록도에 들어온 송 할아버지의 곁을 '못난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만이 지키고 있다
부인과 사별후 얼마전 소록도에 들어온 송 할아버지의 곁을 '못난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만이 지키고 있다 ⓒ 인권위 김윤섭
"정착촌(병이 치료된 음성환자들이 모여 사는 자립 마을로 전국에 88개의 마을이 있음) 사람들처럼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 나병은 손과 발에 땀이 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상처가 났을 때거든. 한 번 상처가 나면 10년이고 20년이고 낫질 않아. 다리를 절단하는 환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소록도의 나환자들은 정착촌에서 살고 있는 음성환자들을 입에 올린다. 일반병원 출입도 가능하고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간다는 건 소록도 나환자들이 부러워하는 일이다. 정착촌에 살고 있는 그들과 달리 소록도 나환자들은 교통비 7200원과 경로수당 45000원이 한 달 수입의 전부다.

"국가에서 의식주를 다 해결해 준다지만 우리라고 입고 싶은 옷이 없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이 없겠습니까. 메리야스도 1년에 한 벌뿐이고, 신발도 한 켤레밖에 안 나오거든요. 피복이라고 해야 고작 잠바떼기 하나가 전부고요."

이름을 밝히기 꺼려 하는 나환자의 말마따나 피복으로 나오는 점퍼는 문제가 많았다. 무작위로 지급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색상도 그랬다. 크레파스 색깔만 해도 얼마나 다양하며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은 또 어떠한가. 원생들 모두가 국가에서 지급되는 한 가지 색상의 점퍼를 입고 있자니 수용소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일지 모르겠으나 자치회를 통해 요구했더니 시정이 되더군요. 무상으로 지급되던 피복이 지금은 1인당 2만원씩 현금으로 지급되어 각자 옷을 사 입고 있는데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소록도는 현재 부부로 인연을 맺어 살아가는 나환자와 독신으로 살아가는 나환자들이 반반이다. 물론 여기에도 외출증을 끊어야 외출이 가능한 것처럼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부부로 살다가도 한쪽이 사망하거나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독신자 숙소로 옮겨가야 한다. 이처럼 700여 명이 이웃하며 살아가는 소록리 2번지는 작은 정부나 다름없다.

"2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자치회 회장을 선출할 때면 제법 선거 분위기가 납니다. 원생들이 직접 투표해서 선출하기 때문에 후보자들은 공약에 거짓이 없어야 하고 박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대변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자치회를 인정은 하면서 운영비는 안 주는지 모르겠어요."

노동조합 성격을 띠고 있는 나환자 자치회는 이처럼 해야 할 일이 많다. 50∼60명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도 자치회 몫이다. 물론 여기에도 자치회를 통해 정한 규칙과 규율은 존재한다.

나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례비를 미리 저축해 두는 편인데, 나환자 중 누군가 사망을 하면 원생자치회는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러야 하고, 사망자 앞으로 예금되어 있는 돈은 6:4의 비율로 나눈다.

6은 장례준비를 하는데 쓰고, 4는 입관자 비용과 목회자, 신부들의 수고비로 지불된다. 그래도 돈이 남을 때는 헌금으로 바친다. 이렇게 떠나보낸 동료들만 해도 소록도가 생겨나고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부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외부와 이어지는 통로에 있다.

세계보건기구협회는 한국의 나병 발병률 숫자가 제로에 가깝다는 전제를 들어 퇴치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작 자국민의 인식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고흥은 그래도 덜한데 우리하고 가장 가까이 사는 녹동이 문제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식당에 들어가면 밥을 주지 않아. 돈을 주는데도 말이야. 어쩌다 밥을 주는 주인도 있긴 한데 거기는 거기대로 조건이 까다로워. 구석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조건이 붙거든."

돈을 내고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세상. 지은 죄도 없이 쫓기듯 식당 구석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세상. 그것도 참을 수 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일부러 손님이 없는 식당을 골라 들어갔을 때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식당 주인들은 예약이 되어 있다거나, 재수 없다거나, 주제를 좀 알라는 등의 말로 나환자를 대한다.

"그런 소리 들으면 마음이 어떤 줄 알아? 죽고 싶어져.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먹으러 간 것도 아니고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들어간 건데…."

녹동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은 주민들 나름대로 말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배고플 때 밥 먹고 싶은 충동처럼 정직한 본능이 또 있을까. '도움의 집'에서 간호조무를 맡고 있는 허옥희(41)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두 다리가 절단되고 한 손은 엄지손가락만 겨우 남은 어느 환우분이 있어요. 그래도 그분은 재봉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부수입을 만듭니다. 돈보다는 자신도 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재봉일을 한다고 할까요. 육체의 병을 이겨 내기도 힘든데 정신적인 병까지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럴 거야"

침대에 누워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나환자
침대에 누워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나환자 ⓒ 인권위 김윤섭
16년 전의 기억을 쫓아 <도움의 집>으로 들어서자 이추(84) 할아버지가 환자용 침대에 누워 있다.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뼈마디 앙상한 몽당손에 가까스로 하모니카를 걸친 채 불고 있다.

두 눈마저 감기고, 두 손마저 다 닳아 버리고, 두 발도 다 닳아지고 없는 몸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는 허 간호조무사의 말에 '고향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지금은 비뇨기와 장기에 문제가 생기고 기력을 회복할 면역력마저 바닥으로 추락해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16년 전, 두어 날을 함께 보내면서 이런 말을 들려준 것도 같다.

"여기는 아무라도 사람을 정하고 살아. 엄마를 정하고 아버지를 정하고 누나를 정하고 동생을 정하고 그래.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거든. 그런데도 미쳐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이고 싶어서 그럴 거야."

반가운 이의 얼굴마저 볼 수 없는 눈, 눌러앉은 코, 밥숟가락 들 기력마저 잃어버린 손, 여름에도 털신을 신어야 하는 몽당발….

나환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어떤 곳일까? 자신을 내쫓고 자신을 내버린 그곳은 과연 얼마나 변해 있을까? 그들은 손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고, 살아간다. 몽당손에 고무 밴드나 붕대를 칭칭 감아 그 사이에 호미자루를 끼워 넣어 밭을 매고 씨앗을 뿌리면서…. 그들은 그 열매를 혼자 먹지 않는다. 동료들과 나눠먹고 직원들과 나눠먹는다. 사람이 그리운 그들은 자신이 사람 대열에 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한테 외면당하는 일처럼 눈물나고 서러운 천형도 없는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