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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you speak 'in' English?(영어 할 수 있어요?)"

파키스탄인 두 명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대뜸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약간 건들거리며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둘 다 동양인 같지 않은 큰 키에, 한 명은 얼굴에 맞지 않는 작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 조금, little"하며 짧게 답한 사람은 카투사 출신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영어라면 원어민 못지 않게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인데도, 겸손하게 답하고 찾아 온 사람들은 앉으라고 권하며,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묻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자니, 지켜보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이었습니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것처럼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며 들어왔던 파키스탄인들은 영어가 그리 유창하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반면 영어를 조금 한다고 했던 전도사는 상대방이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자, 파키스탄인들 영어 수준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눈높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짤막짤막 단어별로 천천히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며 그들이 왜 왔는지를 확인하고자 애쓰는 모양이 어지간한 인내가 없으면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결국 한국어를 잘하는 방글라데시인 하비브가 옆에서 거들어 줘서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과 인접하고 있어서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비브는 파키스탄인들 통역을 종종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파키스탄인들이 왜 영어로 질문을 던지며, 사무실로 들어 왔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대개의 경우 영어로 물어오는 사람들은 일종의 자존감을 표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일을 할 때나, 길거리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이지만, 한 가지 꿀리지 않을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득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의도적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영어회화를 잘 하지 못하는 반면, 영어를 구사하는 자신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의 태도가 간혹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오죽했으면 그럴까 하는 것은, 영어에 죽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을 안 걸었을 때는, 그저 피부색만 보고 우습게 보다가, 영어로 말을 걸면 괜히 기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비단 영어를 사용하는데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출신국을 물어볼 때도 간혹 비슷한 반응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지난 7월 법률상담봉사를 막 시작한 사법연수생들을 용산에 있는 한 단체에서 교육시킬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루비라는 아프리카 출신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실직으로 성남외국인노동자의집 쉼터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사람으로 이미 안면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저를 알고 있었지만, 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미국인이라고 밝히고는 사업차 용산에 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왜 그가 그렇게 말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무시하는 반면,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비굴하다거나 기회주의적이라거나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출신국을 따져가며 대접하는 우리의 태도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지 않았는지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면서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 눈높이 대화를 해 나갔던 전도사처럼,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서로 거짓됨이 없이 만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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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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