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기자 주

사실 디트로이트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인접한 플린트와 상황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 도심으로부터 북서쪽에 있는 '포커스:호프(Focus: Hope)'라는 공동체 지원단체만 들른 뒤 디트로이트 서쪽에 있는 디어본(Dearborn)의 헨리 포드 자동차 박물관으로 직행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치 폭격 받은 바그다드를 연상시키는 듯 폭삭 내려 앉은 빈집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어 계속 셔터를 누르며 그 끝을 좇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는 디트로이트 북서쪽에서 남서쪽까지 이어졌다. 그 끝인 미시간 애버뉴(Michigan Avenue)에는 그 절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웅장함이 시선을 끌었다. 주위에 견줄 만한 건물 하나 없는 넓은 숲에 고색창연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한 컷 누르고 다시 차를 몰아서 다가가니 감탄은 경악으로, 경악은 탄식으로 바뀐다.

▲ 디트로이트 시내에 버려진 건물들
ⓒ 홍은택
아침 8시 서광을 받고 정정하게 서 있는 그 건물의 유리창들은 다 깨져 있었다. 내부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진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 누가 그렇게 일일이 그 많은 유리창을 다 깰 수 있을까. 바로 시간의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더 다가가니 건물 앞 잔디 광장에서 여름잠을 자던 노숙자들이 부시시 일어난다.

건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건축을 잘 모르는 맨눈으로 보면 백악관을 옮겨놓은 듯한 3층 높이의 정면 건물과 그 위의 사무실 공간, 그리고 아치 모양의 창문이 있는 마지막 2개 층. 모두 18개 층이다.

껍데기로 남은 미시간 중앙역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건물 밖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건물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들고 '포커스:호프'에 있는 직원에게 들고 갔다. "이 건물이 도대체 뭡니까."

이 직원은 “아하, 이 건물”하면서 필자에게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한 묶음의 자료를 갖다 주었다. 그 사이트는 www.forgottendetroit.com, 바로 '잊혀진 디트로이트'다. 여기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정면에 있는 거대한 아치 모양의 창문과 창문을 부축하고 있는 육중한 두 개의 기둥 구조는 그리스의 코린트 양식을 본 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에 있는 사무실은 모두 로마의 욕실 구조에 따라 지어졌다는 설명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설마 초대형 사우나 건물을 지은 건 아니겠지.

▲ 미시간 중앙역의 원경
ⓒ 홍은택
이 건물이 바로 미시간 중앙역(Michigan Central Depot)이다. 1913년 12월 26일 첫 열차가 도착했고 1988년 1월 5일 마지막 열차가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중앙역은 이전의 역이 화재로 불타는 바람에 마감 공사도 하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75년 사용되는 동안 꼭대기 층을 완성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너무 장사가 잘 돼서, 이후에는 너무 안 돼서 손을 대지 못하다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호텔 전문 설계회사인 워렌&웨트모어(Warren & Wetmore)와 엔지니어 리드와 스템이 설계한 이 건물은 폐쇄 전까지는 디트로이트의 건축미를 대표했다. 그 건축미의 백미는 반원형의 높은 천정을 그리스 도리스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넓은 대합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은 이 곳 디트로이트에서 마악 쏟아져 나오던 자동차를 유심히 보지 않았다. 일단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이처럼 큰 건물 자체가 수요를 창출해 주변 지역의 개발을 촉진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심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뭔가를 타고 와야 하는데 승객들이 그 때 생산되기 시작한 자동차를 타고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넓지는 않지만 주차장이 있었던 정면을 놔두고 굳이 건물의 동쪽에 정문을 만들었다.

▲ 가까이에서 본 미시간 중앙역
ⓒ 홍은택
이 정문은 전차와 인터어번(Interurban)이라는 도시 열차의 정거장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터어번 서비스가 중단되고 전차도 사라져 버리자 갑자기 역이 고립됐다. 그래도 2차 대전까지는 전장으로 군인들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눈물 특수에 힘입어 번성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와 시카고를 연결하는 94번 고속도로와 자동차의 세찬 도전에 결국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는 1956년 매각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원매자가 없었다. 1963년에도 시도된 매각이 무산되자 중앙역의 시설들이 부분 부분 폐쇄되기 시작했다.

1971년 미 전국철도회사인 앰트랙(Amtrak)이 승객 수송 부문을 인수하면서 잠시 소생의 가능성을 보였지만 버티지 못하고 1988년 문을 닫았다. 디트로이트의 상징인 중앙역을 되살려야 한다는 캠페인도 자주 있었지만 조용히 안에서 삭고 있는 중이다(중앙역을 대신해 하루에 두 차례씩 시카고와 디트로이트를 왕복하는 기차의 정거장은 도심에 있다).

최근에는 크와미 킬패트릭(Kwame Kilpatrick) 디트로이트 시장이 "도시 쇠락의 상징을, 도시 부활의 상징으로 바꿔 놓겠다"며 1억 달러를 들여 이 건물을 매입, 경찰청으로 개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언론의 반응은 그럴 돈이 어디 있냐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과거 16년 동안 이와 비슷한 발표가 되풀이됐지만 제대로 이행된 적은 없었다.

미시간 주의 최대 신문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The Detroit Free Press)>의 경제부장 마이크 샌티(Mike Sante)는 "지금은 자금 조달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라며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잊혀진 디트로이트'라는 주제로 옛 건물을 촬영해 www.forgottendetroit.com에 올리고 있는 데이비드 코먼은 이 중앙역이 "대중 교통 수단에 대한 자동차의 완벽한 승전 기념탑"이라고 말했다.

▲ 미국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행복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헨리 포드 자동차 박물관에서.
ⓒ 홍은택
자동차의 수도인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다. 제리 헤론(Jerry Herron)이 정리한 연대표에 따르면 세계에서 처음으로 1901년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생긴 곳도 디트로이트고, 도로에 중앙선이 처음 그어진 곳도 1911년 디트로이트 근방의 리버 로드(River Road)다.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세계 최초의 자동차 사망 사고도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났다. 1902년 교차로에서 조지 비셀(George W. Bissel)이라는 사람이 마차에 타고 있다가 자동차에 받혀 숨졌다고 한다.

그러니 교통 신호등이 디트로이트에서 처음 생긴 것은 당연한 이치. 1915년의 일이다. 1942년에는 세계 최초의 도시 내부 고속도로인 데이비슨(Davison)이 생겨 났고 지금도 그 위를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다. 동전 잡아 먹는 기계인 자동차 주차 미터기가 생긴 곳도 디트로이트 거리들이다.

자동차로 쇠퇴한 디트로이트

그러나 묘하게도 디트로이트 몰락을 재촉한 원인들 중 하나도 자동차였다. 백인 중산층은 더 넓고 크고 '안전한' 집을 찾아 교외로 빠져 나갔다. 자동차가 있으니 통근 거리가 늘어나도 무방했다. 1950년대 185만명까지 올라갔던 인구는 2003년 91만명(인구통계국의 평가치)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미국에서 1967년 '12번가의 폭동(The 12th Street Riot)'이라고 불리는 백인 경찰과 흑인 주민의 충돌이었다. 7월 23일 디트로이트 시내 12번가에 있는 술집에서는 월남전에서 무사 귀환한 이웃 두 명에 대한 흑인들의 축하 파티가 새벽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평소 흑인을 못살게 구는 것으로 악명 높은 태크반(Tac Squad) 소속의 경찰 4명이 무허가 술집 단속을 이유로 파티 현장을 덮쳤다. 그리고 82명에 달하는 손님 전원을 체포해 술집 앞에 세워 뒀다. 그러자 그 곳으로 지나가는 흑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체포된 흑인을 태운 마지막 경찰차가 현장을 떠나자 누군가가 인근 옷 가게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게 봉기의 신호였다. 닷새 동안 모두 43명이 사망하고 1189명이 다쳤으며 7000명이 체포되는, 당시로서는 최악의 폭동이 일어났다. 건물 1400채가 불탔고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8000명의 군 병력이 투입됐다.

폭동은 진압됐지만 후유증은 컸다. '하얀 탈출(white flight)'이 잇따랐다. 백인들은 앞다퉈 도시를 빠져 나갔다. 꼭 폭동의 여파는 아니지만 자동차 공장도 교외로, 남부로, 그리고 해외로 빠져나갔다.

▲ 하일랜드 파크에 있는 모델 T 공장
ⓒ Lowell Boileau
오늘날 디트로이트에서는 자동차 공장마저 풍화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 중앙역에서 한 20분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일랜드 파크(Highland Park)의 모델 T(Model T) 공장이 나온다. 바로 자동차 혁명의 발상지다.

▲ 쇼핑 몰에 가려진 모델 T 공장
ⓒ Lowell Boileau
헨리 포드는 1908년 조립 공정과 대량 생산 체제를 자동차에 처음으로 적용해, 첫 자동차인 모델 T를 만들었다. 그곳이 포드 피켓 공장(Ford Piquette Plant)이었다. 하지만 모델 T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곳은 1909년에 세워진 바로 하일랜드 파크 모델 T 공장이다. 이 공장에서는 지금으로 봐서는 많지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연간 1천대씩 자동차를 생산해 냈다.

유령의 도시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의 산업 유적 보존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화가 로웰 보일루(Lowell Boileau)는 "그 유서 깊은 공장은 70년 가동이 중단된 뒤 지금은 일부만 창고로 쓰일 뿐"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바로 건물 앞에 쇼핑 몰이 세워져 모델 T 공장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옹색하게 만들고 있다.

자동차 공장 만이 아니다. 디트로이트는 역사를 돌볼 여유도 없다. 17층짜리 고딕 건축 양식의 보석 같은 메트로폴리탄 빌딩(Metropolitan Building), 20년대 찰리 채플린 등이 합자해서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극장(United Artists Theater) 등 대공황 이전 번성하던 디트로이트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철거 또는 부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스러져 가고 있다.

▲ 폐쇄된 패커드 자동차 공장과 루터 교회의 공동묘지
ⓒ Lowell Boileau
사실 고대의 유적, 예컨대 불국사나 첨성대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거짓이다. 오히려 그 장구한 시간 내내 계속돼 온 관리와 투자의 결실이라고 봐야 한다. 방치되는 건물들의 운명을 디트로이트처럼 잘 보여 주는 곳도 없다.

디트로이트는 무엇보다 자동차 공장의 무덤이다. 로웰 보일루에 따르면 고급 차종이던 패커드(Packard)를 생산하던 공장은 57년에 문닫은 뒤 그대로 루터 교회의 공동 묘지와 함께 남아 있다가 최근에 철거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디트로이트 시민들이 공사 집행정지 소송을 제기해 철거가 중단된 상태다.

오래된 건물의 철거는 사형 집행과 다름없다. 디트로이트 경제의 호전으로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디트로이트 곳곳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폭파 장면은 장관이다. 하지만 보고 나면 남는 건 비애뿐이다.

▲ 시민들의 반발로 철거가 중단된 패커드 자동차 공장
ⓒ Lowell Boileau
흉가로 변해 있는 이 건물들을 폭파시키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그대로 놔두는 게 나은가. 물론 제대로 보존하는 게 가장 좋지만 사회가 그럴 여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근본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을 다 안고 현대를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탈산업화 시대의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안고 있는 공통된 숙제다. 인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디트로이트의 소생

디트로이트는 최근 들어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앙역의 개조 논의도 그렇고 1200개 객실 규모의 아름다운 호텔인 북-캐딜락 호텔(Book-Cadillac Hotel)도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77년 된 폭스 극장의 2002년 재개관은 도심의 재탄생을 알리는 화려한 전주곡이었다. 포드 필드 스타디움도 지어졌다.

샌티는 "디트로이트는 특히 12억 달러를 들여 공항 시설의 확충에 집중하고 있다"며 "디트로이트 메트로 에어포트는 평행을 이루고 있는 4개의 활주로에서 동시에 비행기들이 이착륙할 수 있는 미국 내 유일한 공항"이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는 철도에서 자동차를 거쳐 이제는 항공기 시대에 승부를 걸고 있는 셈이다.

2004년 미 프로농구에서는 스타가 없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 칼 말론과 같은 스타들이 쟁쟁한 LA 레이커스를 무찌르고 우승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디트로이트의 역사를 조금 아는 필자로서는 구(舊)경제의 디트로이트가 신(新)경제를 대표하는 대도시 로스앤젤레스를 제치고 높이 비상하는 것 같은, 이중의 감동을 받았다.

▲ 일곱 자매(Seven Sisters)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공장의 폭파 장면
ⓒ Lowell Boileau
그 얘기를 꺼냈더니 샌티는 "정확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면서 "피스톤스는 디트로이트시에서 몇 십 마일 떨어진 어번 힐즈(Auburn Hills)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피스톤스가 디트로이트만이 아닌 교외까지 다 합친 메트로폴리탄 디트로이트의 팀이라는 얘기다.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검은 도시다. 시 인구의 81.6%가 흑인이다. 백인 인구는 12.3%밖에 안 된다(미국 전체 백인의 비율은 75%다). 반면 어번 힐즈와 같이 메트로폴리탄 디트로이트를 구성하고 있는 교외의 인구는 거꾸로 78%가 백인이다. 마치 교외의 하얀 도시들이 검은 디트로이트를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너희들끼리 어떻게 하나 지켜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유령의 도시였던 디트로이트가 이제는 바닥을 치고 올라서는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더 이상 유령의 도시는 아니다"는 샌티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싶다. 흑인들만으로도 도시가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싶은 것이다.

다음은 1805년 불에 탄 디트로이트를 재건할 때 제정된 뒤 199년간 내려온 시의 모토다.

"우리는 보다 나은 날들을 희구한다. 그것은(디트로이트는) 잿더미에서 일어날 것이다(We hope for better days; it shall arise from its ashes)."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블루와 레드, 길에서 만난 두 개의 미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