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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십이월 중순, 슈르파크 점령으로부터 스무날 후였다. 에인의 군사들은 벌써 라라크의 강변으로 이동해 있었다. 라라크는 티그리스 강 쪽의 도시국가였다.

하지만 침략 상황은 좋지 않았다. 우선 도시가 강과 가까이에 둥지를 틀었고 또 그 어느 곳보다 나루가 활성화가 되어 배도,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으며, 강변 아래쪽의 벌판이라 해도 은폐물이 없어 곧 노출될 수 있는 지대였다. 그런데다 라라크엔 환족 용병도, 그 도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 침략에서 에인은 몇 가지를 간과했다. 우선 사전 정탐을 하지 않았다는 것, 강줄기를 따라 일어선 도시들이라 그곳이 유프라테스든 티그리스든 다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슈르파크를 너무 쉽게 접수한 나머지 이곳도 대충 치러질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둥근 달이 떠올랐다. 군사들은 명령에 따라 모두 소등을 하고 일찍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참모들은 밖에 서서 에인의 꾸중을 듣고 있었다.

"제후는 그새 뭘 했더란 말이오? 강 사이의 땅이라면 손금을 보듯 훤히 꿴다던 사람이 그래, 라라크에 대해서는 기초 정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단 말이오?"

제후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에인은 다른 참모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도 다그쳐댔다.

"참 답답들 하오. 누구 한 사람 입이라도 열어보란 말이오? 지금 당장 치고 보자거나 아니면 물러 나자거나…."

그때 할머니가 나섰다.

"이번엔 두수를 보내보면 어떨까요?"

두두는 에리두에 남아 있어 두수를 지목한 것이었다. 강 장수도 얼른 동의를 했다. 사실 그 방법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두수를 침투시키고 우린 좀 더 아래쪽으로 물러나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럼 곧 출발을 시키시오."

할머니는 그 명령을 받고 서둘러 자기 천막으로 돌아갔다. 천막 앞에는 두수가 서 있었고 그 안에는 닌이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울 때는 천막 앞에 늘 장손자 두수를 세워놓았다. 아무리 남장을 시켰다 해도 닌이 여성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고, 또 아직은 닌이가 에인의 배필이 될 사람이란 사실이 공식화되어 있지 않아 그렇게 미리 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둘 다 내 앞에 앉거라."

두수와 닌이 앉자 할머니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둘이 지금 곧 도시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아직 밤이 늦지 않았으니 병영이나 상점거리로 출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무엇을 알아 와야 하는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 것이고, 자, 여기 웨브 뭉치다. 닌이는 보석함도 챙겨라."

이번에는 웨브 천과 보석 장사꾼으로 변장하라는 뜻임을 두 사촌들은 얼른 알아차렸다. 닌이는 서둘러 두건을 썼고 두수는 웨브 천 뭉치와 보석함을 들었다.

"자, 그럼 출발해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마침 제후가 천막으로 오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제후에게 말했다.

"마침 잘 왔네. 자네도 이들을 따라가시게. 도시 가까이까지 가서 말에서 내리면 자네가 이들의 말을 끌고 오시게. 돌아올 시간 약속도 잘 해두시고."
"그러겠습니다."

제후는 핑, 하게 달려가서 말 두필을 끌고 왔다. 젊은이들이 한 말에 오르자 그도 자기 말에 올라 앞장을 섰다.

두수와 닌이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들이 수집해온 정보에 의하면 라라크는 오래전부터 군주제로 정착된 도시라고 했다. 그러니까 원시 민주제로 남아 있던 슈루파크와는 그 상황이 판이했다. 그들에게는 군사와 성이 있었고, 인구 또한 많았다.

"한데 1년 전에 군주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군주의 아들이 아닌 사제로 말입니다."

두수가 말했다.

"사제가?"

전 군주는 악명이 자자한 패륜아였다. 그는 술과 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또 여자들에게 선심 쓰는 것을 좋아해 날마다 새로운 보석을 수입해 들였다. 국고는 일찍이 동이 났고, 그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주민들에게 재산 반분이라는 명목을 적용해 양 열 마리 가진 사람은 다섯 마리씩, 나루를 이용하는데도 양털을 한 자루 씩이나 물게 했다. 그의 세금착취는 극에 달했고, 주민들의 불만도 날로 더해갔다.

"그때 사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새 군주는 '강의 신'사원의 사제로서 자주 궁정을 드나들었고, 그래서 궁정병사와도 자연스레 친할 수 있었는데 결국은 그들을 도모해 그 군주를 몰아내고 새 군주가 된 것이었다.

그는 야망이 컸으나 그것을 숨길 줄도 아는 처세가였다. 또 궁정은 어떻게 지키고 주민의 환심은 어떻게 사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세금을 대폭 삭감해 작은 양의 기름과, 양털과 곡물, 염소만을 공물로 받았다. 무릇 새 군주가 등장할 때면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깐 동안 그런 선정을 베풀기도 하는 것이 전례였음에도 워낙 시달려오던 주민들이라 그 혜택에 그만 모두 감복해버렸다.

"한데, 그런 군주가 직업군대를 지휘한다구?"

에인이 물었다.

"예, 그가 군주가 된 이후 첫 번째로 창설한 것이 직업군대라고 했습니다."
"사제가 군주가 되면서 먼저 창설한 것이 직업군대다? 이 주변에는 침략해 올만한 세력도 없다지 않았나?"

에인이 두수에게 확인 차 다시 묻는데 그 대답은 제후가 해주었다.

"또 누군가가 자기처럼 반란을 일으킬까보아 두려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숫자가 천이나 된다지 않소?"
"전 군주의 경우를 보아 궁중병사만으로는 항구적인 안정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무튼 두수의 보고를 더 들어보지요."

두수가 뒤를 이었다.

"군인들은 날마다 강한 훈련을 하지만 그래도 급료가 넉넉해서 힘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술집이나 기름 가게에서도 모두가 새 군주를 칭송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새 군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창을 들고 군주를 지킬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두수의 마지막 보고는 군인들은 물론 주민들로부터도 군주는 신망과 칭송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인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어보았다.

"새 군주가 칭송받는 까닭이 선정을 베푸는 것 외엔 또 무엇이던가?"
"그 군주는 사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도시의 주신인 '강의 신'의 사제였고 주민들 역시 그가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신통력도 있다던가?"
"예, 술 취한 노인은 군주가 강물을 세우거나, 안개와 비바람도 일으킬 수 있다고 떠벌렸습니다."

그렇다면 싸워야 할 적은 세 갈래가 되는 셈이었다. 직업군인과 주민들, 그리고 군주에 대한 신화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적은 신화일 것이며, 그 신화에 의지해 무조건 신봉하고 지키려는 주민들의 용기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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