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휴먼 앤 북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1999년 7월 말,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 공항에서부터 빌린 렌터카를 몰고 해안도로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서 우리는 제주도를 샅샅이 훑었다. 협재굴과 만장굴, 산방산 용머리 해안과 지삿개 주상절리,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함덕해수욕장과 천지연폭포, 제주민속촌과 성읍민속마을, 산굼부리와 1100고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러한 명소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라도와 우도까지 다녀왔는데, 그것은 단지 6박 7일이라는 여유로운 일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왕 시간을 내어 왔으니 가능하면 더 많이 보고 가자는 눈의 욕심이 우리를 이리저리 잡아 끌었다고 말해야 솔직하리라. 서귀포에서는 바다 속까지 들여다 보려고 제법 많은 돈을 내고 노란 잠수함까지 탔으니, 두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다녀온 곳들의 기억은 판에 박은 듯한 사진 몇 장으로만 남아 있고, 몇 토막의 희미한 추억들도 아직 현상이 덜 된 필름처럼 아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제주도 '여행'이 아니라 제주도 '관광'을 다녀온 것이로구나! 지난 며칠 동안 내가 김영갑의 아름다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으며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2.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은 사진작가 김영갑을 두고 '작고 보잘것 없는 곳에 신께서 숨겨 놓으신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희망의 희자는 바랄 희(希)자이지만 희귀할 희(稀)자이기도 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의 이러한 평가는, 사진작가 김영갑이 십만명에 단지 한두 명만이 걸리는 희귀한 불치병인 루게릭병에 걸려 5년이 넘게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진 갤러리 '두모악'을 일구어냈다는 입지전적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김영갑의 아름다운 사진 산문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황대권의 의미심장한 지적처럼, 바랄 희자와 희귀할 희자가 겹쳐 보이는 희망의 풍경이다. 나는 그의 희망(希望) 앞에서는 기뻐서 탄성을 질렀고, 그의 희망(稀望) 앞에서는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루게릭병 때문에 근육이 녹아 내려 이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힘조차 없는 그의 손가락과 안면 근육의 고통 때문에 미소를 짓는 것조차 힘든 그의 얼굴 앞에서 나는 울었다. 그런데도 그는 루게릭 병을 신이 자신에게 준 선물로 여기며, 그의 눈으로 수없이 사진을 찍고 그의 마음으로 따스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 그의 눈과 마음이 없었다면 나의 눈물은 결코 위로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 현재가 이어도이다. 아직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날숨과 들숨이 자유로운 지금이 행복이다. (27쪽, '시작을 위한 이야기')

20년 가까이 제주도에 살면서 자신의 영혼과 열정을 다 바쳐 제주도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어온 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힘조차 남겨 놓지 않은 루게릭 병은 분명 사형 선고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텐데도, 그는 이렇게 이곳이 '낙원'이고 지금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희망(稀望)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희망(希望)을 꿈꾸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그가 20여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면서,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이어도'를 온몸으로 느꼈고 또한 그것을 사진에 담아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이어도'를 만나곤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수록되어 있는 그가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고백이 결코 거짓이 아니며 과장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가 사진에 담아낸 제주의 풍경은 우리가 흔히 관광 안내서에서 보게 되는 그런 흔해 빠진 풍경들이 아니다. 제주도임을 알려주는 특별한 표지가 들어가 있지도 않다. 그저 노을 지는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넓은 들판에 넘실거리는 억새의 물결, 또는 드문드문 드러난 나무들만이 단조로운 풍경에 변화를 주고 있는 눈 내린 벌판의 풍경 같은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심상하게 보이는 그런 풍경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나무에게 전하고 있는 노을의 그리움과 억새에게 속삭이고 있는 바람의 숨결과 그 아래 누런 땅을 감싸고 있는 눈 내린 벌판의 생명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사진작가 김영갑이 평생 동안 찍고자 한 피사체들의 진정한 이름일 것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사진가는 세계적인 명승지를 찾아 나선다 해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굳이 사진으로 작업할 이유가 없다. 그 곳에 가서 풍경을 직접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시간과 돈이 없어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작품이라고 과대 포장을 할 필요가 없다. 정보를 위한 사진이라면 오히려 동영상이 효과적이다. 바다 사진을 찍더라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본다는 행위에도 육감이 동원되어야 한다. 만져 보고 느껴 보고 들어 보고 맡아 보고 쳐다 보고 난 후 종합적인 감동이어야 한다. 일출과 일몰 사진을 통해 내가 감상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은 둥근 해가 떠오르고 넘어가는 과정의 풍경뿐만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그 감동까지 함께 나누고 싶다. (135쪽, '믿을 수 없는 일기예보'에서)


그래서 그는 그렇게 찍은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진에 사진가의 영혼이 담기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셔터 한 번 누르기 위해 며칠, 몇 달 아니 몇 년을 기다릴 줄 알아야 비로소 사진가의 영혼이 사진에 담기는 법이다. 그가 돈도, 명예도, 가족도, 결혼도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육체까지도 제주도에 다 내어 주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진에 대한 뜨거운 예술혼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김영갑은 루게릭병이라는 희귀한 병에 자신의 육신을 내어 주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영혼을 제주도에 내 준 희귀한 사진 작가였다. 그리고 그가 제주도에 은거하면서 오직 사진에만 매달린 지난 20여년의 세월은, 제주도의 초원과 바다에 의탁하여 자신의 영혼을 찍어 내기 위한 부단한 희망의 줄다리기였음도 깨닫게 된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그러한 희망을 완성한다. 카메라의 렌즈를 들여다 보지 않고도 이제 그는 제주의 자연 속에 깃든 자신의 영혼을 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대신에 눈을 깜박여서 그 풍경을 찍는다.

따라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뀌어져야 마땅하다. <내 안에 그 섬이 있었네>라고. 여기서 그 섬은 물론 제주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어도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조차도 김영갑이 찍은 사진을 보고는 "이거 제주도 맞아?"라고 묻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3.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발견하는 자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것은 오직 누리는 자의 몫일 뿐이다. 김영갑은 제주도에 마음을 내 준 이후로 그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루게릭병에 육신을 내 준 이후로는 그 삶을 발견했다.

그래서 황대권은 김영갑이 찍은 사진의 아름다움과 그의 글에 담긴 겸허한 삶을 가리키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걸려 있는 희망은 선망에 가깝다. 선망은 너무도 쉽게 욕망으로 변질하고 만다."

그렇구나. 희망(希望)은 정녕 희망(稀望)이로구나. 5년 전 제주도를 샅샅이 훑는답시고 차를 타고 돌아다녔지만, 나는 욕망으로 변질된 선망의 눈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곳만 보고 돌아온 것이었구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이곳 오클랜드에서 제주도를 발견할 수는 없는지, 주위를 다시 둘러본다. 어디에 살든 풍경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내 마음 속에 깃든 영원한 섬 '이어도'는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섬에 내가 있으며 동시에 내 안에 그 섬이 있음을 믿는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201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