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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대 설립자 야청 최해청
청구대 설립자 야청 최해청
야청(也靑) 최해청(崔海淸·1905~1977). 그와 그가 건립한 '청구대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구지역에서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가 건립한 청구대학이 지난 1967년 박정희 정권 시절 '공중분해'된지 이미 40년 가까운 긴 세월이 흐른 탓이다.

청구대학의 '흔적'은 당시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합병돼 건립된 '교주(校主) 박정희'의 <영남대학교 50년사>(97년 발간)에서만 '어렴풋이' 묻어난다. 37년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청구대학과 창립자 야청 최해청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생활화' 청구대학의 창건 과정

청구대학은 해방 이후 야청이 시국을 걱정하는 모임인 '삭망회'(朔望會)를 조직할 당시 대구시보사(大邱時報社) 장인환 사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1947년 3월 야청은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으로 취임했다. 독립운동국은 "해방 기운은 식어들고 일제잔재가 고개를 든다"며 탄식했던 야청과 장 사장이 '독립운동의 생활화'를 기치로 만든 기구.

야청은 독립운동국을 기반으로 대중학술 강좌를 열고 당시 세계어 '에스페란토' 강좌를 포함한 대중강연을 개최했다. 에스페란토는 그가 아나키즘에 심취해 대구고보 시절 처음으로 접했다. 그가 준비한 대중강연은 성황을 이뤘는데 그가 청구대학 설립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 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8년 5월 30일 금호강 무태강변에서 '열성적인' 학생들과 지역유지들이 참석하는 야간대학 기성회를 발족하고 대학 창건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청구대학의 모태가 된 대구문리과전문학교를 인가받아 학생을 모집해 개학을 맞게 되는데 바로 1948년 11월의 일이었다.

이후 야청은 1950년 4월 25일 재단법인 청구대학을 인가받아 야간대학으로 발족시켰다. 야청은 청구대학의 이사겸 학장으로 취임한다.

청구대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1955년 대구 중구 문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는 등 최고의 절정기를 이룬다. 야간대학이었던 청구대학은 특히 사정상 고등학문을 배우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61년 초반 청구대학은 문리과대학 이외에도 청구공전·청구중고등 등으로 명실상부한 학교재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야청 최해청과 박정희의 첫 만남

하지만 1950년대 황금기를 이룬 청구대학은 60년대로 접어들며 위기에 봉착한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소위 '대학정비과정'을 주도했는데 이 때 청구대학은 4년제에서 2년제로 격하되었다.

2년제로 격하된 청구대학은 야청에게 위기감을 안겨줬다. 청구대학이 2년제로 격하된 것은 학교 교사 등 물적 설비가 부족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설비 정비에 들어갔고, 이어 전국대학생 재고사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청구대학은 4년제로 회복하게 되었다.

야청 선생과 청구대학을 둘러싼 역사가 담긴 책들. <청구증언>은 야청 선생의 차남 찬식씨가 1997년 야청의 유고인 <청구유언>과 일기 등을 토대로 펴낸 책. 사진 왼쪽 <야청 최해청 선생>은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선생의 업적을 기려 발간한 책이다.
야청 선생과 청구대학을 둘러싼 역사가 담긴 책들. <청구증언>은 야청 선생의 차남 찬식씨가 1997년 야청의 유고인 <청구유언>과 일기 등을 토대로 펴낸 책. 사진 왼쪽 <야청 최해청 선생>은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선생의 업적을 기려 발간한 책이다.
야청이 박정희를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1961년 6월로 이후 그는 박정희와 빈번히 자리를 함께 했다. 박정희는 야청에 대해 여러가지 자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만 해도 야청은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타계할 시점에서 작성한 유고 <청구유언(靑邱有言·77년)>에서 그런 점이 엿보인다.

"...5·16의 성과는 선두에 내건 '혁명공약'에 있었다고 할까. 무엇보다 모든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참신한 기풍으로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데 일단 수긍이 갔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등장은 청구대학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줬다. 청구대학의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한 출혈이 컸던 것 때문이다. 게다가 재단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이 빚어지면서 재정난은 가중됐고 이는 야청에게도 치명타가 됐다.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를 야청이 모두 떠맡아야 했던 것.

재단에서 '축출'... 학장에서 쫓겨난 설립자

직원들의 비리를 둘러싼 책임 공방은 재단 내 반대파에겐 '좋은' 빌미가 됐다. 설립자 야청이 영입한 재단 이사들이 '반란'을 획책한 것. 1966년 12월 재단 이사회는 야청이 학장직을 물러나도록 결정하고 만다.

<영남대학교 50년사>는 당시 상황을 '권고'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야청은 당시 자신이 쓴 일기속에서 '강압에 의한 퇴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야청은 부채문제에 대해 '충분한 실사'를 한 후 퇴진을 하더라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계획은 묵살되고 '명예학장'과 '외톨이' 이사라는 허울만 갖게 됐다.

청구대학의 존재 기반을 흔들어놨던 사건은 이른바 '교사 붕괴사건'이었다. 야청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인 1967년 6월 15일 청구대학 Y자 교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건물이 붕괴된 것.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난 청구대학 교사 붕괴사건은 당시만하더라도 전대미문의 대형참사였다.

붕괴사건은 이 대학 설립자였던 야청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이 붕괴사건은 일선에서 물러난 야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애초 3층 높이로 짓기로 한 건물을 새로운 경영진이 무리하게 5층 높이로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공격의 화살은 야청에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청구대학에 박정희라는 최고권력자의 영향력이 뻗치기 시작한 발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새 경영진은 사태를 수습하기 보다는 군사정권에게 '사죄'를 청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나섰다. 그리고는 대학 설립자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마치 '임금'에게 진상품을 갖다 바치듯 청구대학을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한 사람은 시조시인이자 전 청구대학 교수였던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想·1903~1982)이었다. 설립자 야청과 노산의 관계는 아이러니하다. 과거 노산은 '독야청청(獨也靑靑)'에서 '야청'을 따 그에게 호를 지어줄만큼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였다.

'새역사 창조자'- 야청 선생이 세운 청구대학의 모토가 담긴 비석. 애초 청구대학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남대로 옮겨져 있다.
'새역사 창조자'- 야청 선생이 세운 청구대학의 모토가 담긴 비석. 애초 청구대학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남대로 옮겨져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노산, 박정희 면담... "대통령 백 년 할 수 있나"

당시 노산의 역할은 <영남대학교 50년사>에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

"신축교사가 붕괴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학교는 더 지속될 가망이 없었다. 숨막히는 고비를 수없이 겪은 어느날 최해태 학장과 나(심재완)는 우연히 일치된 묘안을 생각해 보았다... 직접 맡을 사람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맡아달라고 간청하면 맡아주지 않을까... 제안을 들은 이은상은 한 달이 지난 후... 다시 한 달 후 이은상은 청와대 면담 이야기를 학장실에서 학장과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은상은 '대통령을 백년 할 수 없는데, 그만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설 생각은 해보았는가? 회사 사장이 될 수 없고, 외국에서는 대학총장을 하는 일을 많이 보았는데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로 시작하여 그 능란한 말솜씨로 두 시간 동안이나 우리가 제시한 이야기를 펼치니 대통령이 수긍하더라는 전언이 있고 난 뒤..."


청구대학과 설립자 야청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상' 소식을 전해들은 야청은 박정희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전까지 자신을 대하던 모습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박정희의 신속한 청구대학 '접수'... 이후락 실장이 '현장 지휘'

박정희의 청구대학 '접수'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 실무역할은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맡았다. 박정희에게 청구대학을 '진상'한 뒤인 1967년 8월경 애초 이사진 5명 외에 이후 영남학원 재단이사장을 맡게 되는 이동녕과 김성곤 등이 이사로 추가되었다. 이사 명단에는 이후락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락은 이후 청구대학과 당시 지역대학인 대구대학의 '병합'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당시 대구대학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속칭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한 회사의 신뢰 실추를 만회하기 위해 정권에 학교를 '상납'했다.

그동안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을 멀리했던 박정희 정권은 두달 여만인 8월 15일에서야 야청을 만나줬다. 허울뿐인 명예학장이자 이사였던 야청이 만난 사람은 박정희가 아닌 그의 대리인격인 이후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야청에게 뭘 약속했나

당시 박정희와 정권은 설립자 야청에게 무엇을 약속했을까. 자료와 증언들을 토대로 한다면 이후락이 제안을 한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무소불위의 군사정권이었지만 설립자를 회유하기 위한 전략은 필요했든 듯.

다음은 야청 선생이 남긴 자료와 그의 차남 최찬식(77)씨가 주장하는 '정권'의 제안이다.

① 박정희를 고문으로 하고 청구대학의 정신을 이어받는 '대청구'를 건설한다.
② 경리직원들이 저지른 부정경리 감사를 지속한다.
③ 야청이 이후 새로운 대학 건설에 참여하도록 한다.
④ 청구공전은 합병에서 제외하고 야청에게 맡긴다.


최찬식씨는 "당시 야청 선생은 무엇보다 자신이 부정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면서 "부정경리 감사를 지속해줄 것을 요구한 것도 그 이유였다. '대청구'를 건설한다는데 정권의 권위앞에서 반대할 이유가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 이승욱 기자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락의 사무실로 사용됐던 서울 반도호텔에서 이뤄졌다. 야청은 그 날의 만남에서 '정권과 맞붙어 싸우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한 듯 자신을 격하게 나무라는 글을 일기에 남겼다.

"왜 출석여부 재고하지 않았던가... 윤 말대로 (이후락)실장 체면만 세워주면 될 줄 알았더냐... 당대 최고 권력자가 이미 (청구대학을) 먹자고 강행해서 기정 사실화 하고 나섰는데... 기왕 나갔으면 혈투를 하든지, 뿌리치고 나오든지, 물컵만 엎지르고 고성소리만..."(1967년 8월 18일 일기)

결국 같은해 12월 15일 반도호텔 927호와 삼성빌딩 505호실에서는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각각 이사회를 열고 있었다. 이는 두 대학의 합병을 공식 결의하는 자리였다.

대구대학은 성상경·최준·이효상 이사 등이 계획대로 합병을 결정했다. 문제는 청구대학 이사회.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야청은 정권의 '제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합병의 연차적 계획과 학부형과 학생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합병에 서명했다. 이러한 그의 결정은 '자포자기'와 직원의 비리에 대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싶다는 심정에서 비롯됐다고 보여진다.

박정희와 정권, 청구대학 '접수' 완료

옛 영남대학교 전경
옛 영남대학교 전경 ⓒ 영남대학교
야청은 유고 <청구유언>에서 서명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왜 내가 (합병)서명을 했느냐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나, 어차피 나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합의와 서명으로 오늘의 사태에 이른 것이 아니요, 나의 동의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일방적인 행위였다. 서명할 당시 나의 전 신경은 부정비리를 밝혀 달라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야청은 이후 박정희와 정권으로부터 더욱 철저히 외면 당한다. 정권의 약속은 한낱 '식언'에 그쳤고 1967년 12월 25일 박정희는 두 대학의 접수를 완료했다. 박 정권은 큰 충돌없이 20억(대구대학)과 15억(청구대학)을 삼키며 '무혈 입성'에 성공했다. 두 대학의 강제합병으로 영남대학교가 새로 탄생했다.

1967년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강제합병이 있은 후 당시 <매일신문>은 강제합병의 부당성을 알리는 사설을 게재한다. 당시 사설을 쓴 논설위원은 파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7년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강제합병이 있은 후 당시 <매일신문>은 강제합병의 부당성을 알리는 사설을 게재한다. 당시 사설을 쓴 논설위원은 파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남대에 청구대학 설립자인 그의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박 정권은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청구대학의 합병은 일부 신문의 사설에서 비난의 대상이 됐다. 1967년 12월 23일자 <매일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대학의 합병을 비난했다. 그리고 두 대학의 재학생과 동창들도 같은 시기 합병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양 대학의 건학정신을 발판으로 한다면서, 한편 대학의 창립자들이 신설재단에 자리를 같이 할 기회를 균배하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구시를 중심으로한 경북 일원의 교육개발에 기여해온 당 대학의 창건·육성자가 참여의 기회를 잃게 된 사실은 첫째 도의로 수긍될 수 없는 문제가 아니겠는가..."(大邱·靑邱 병합의 명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야청과 청구대학의 '정신'

청구대학과 설립자 야청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독립운동을 탄식하고, 청년들의 자유로운 학문탐구와 대학의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독립정신'을 창학정신으로, '새역사 창조'를 모토로 내세웠던 대학과 그 설립자.

청구대학을 정권에 빼앗긴 야청은 그후 타계(77년) 할 때까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경북지부' 공동대표를 맡아 박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생전에 아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는 '빼앗긴' 청구대학에 대한 미련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다.

"...영남(대학교)에 대해서는...그들이 나의 요구대로 기록해 줄지도 의문이고, 내가 장물학교(贓物學校)를 상대하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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