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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남해안의 바닷가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있는 나
ⓒ 이종찬
1978년 3월 초부터 1986년 2월 말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꼬박 8년을 다녔던 공장을 스스로 그만 둔 나는 마음이 몹시 홀가분했다. 그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억압과 굴종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다가 마침내 끝없는 자유의 세계로 풀려난 것만 같았다. 아니, 보다 드넓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한 기대와 흥분감으로 마구 들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나의 스무살 시절의 8할을 병역특례라는 허울 좋은 제도에 얽매여 공장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어찌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도 찬란하게 빛이 나야 했던 스무살 시절을 요란한 기계 소음과 함께 몽땅 날려버리고 만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공장을 그만 둔 나는 며칠 동안 남해안 일대를 기웃거리며 홀로 여행을 다녔다. 나는 그렇게 한 달을 보낸 뒤 퇴직금을 타기 위해 공장 총무부를 찾았다. 지금은 퇴직을 한 그날로부터 14일 이내에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 당시 내가 다닌 공장에서는 퇴직을 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퇴직금을 내주었다.

"아니, 자네는 아직까지 사표가 수리되지 않고 있는데?"

"그기 머슨 말씀입니꺼? 사표가 정식으로 수리되지 않았다 카더라도 3일 동안 무단 결근을 하면 자동으로 해고가 되는 게 아입미꺼?"

"자네의 퇴직금을 내주기가 싫어서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게 아니네. 해당 부서장과 상의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사표만 툭 던져 놓고 나가버리면 어떡하나 이 말일세."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표로 안 받아주는 거로 낸들 우짜겠습니꺼?">


그랬다. 내가 공장을 그만 두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공장에서 몇 번이나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연락이 닿는 즉시 꼭 공장에 다녀가라고 하십시오'라며. 그때 어머니께서는 '니 혹시 공장에서 머슨 사고라도 치고 나온 기 아이가'라며 걱정을 하시기도 했다.

그날 나는 한동안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퇴직금을 모두 받았다. 그리고 공단상가 곳곳에 남아있는 외상값을 모두 갚았다. 졸지에 밀린 외상값을 몽땅 받아든 아줌마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뿌듯했다. 아니, 정말 속이 후련했다. 공장생활 8년 동안 쌓이고 쌓였던 그 어떤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공장간부들 몰래 활동하고 있었던 <남천문학동인회>의 이름도, 동인들과의 토론을 거친 끝에 <자유문학동인회>로 바꾸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아마도 우리 동인들 또한 '자유'란 낱말이 너무도 그리웠던가 보았다. 그때 초대회장은 내가 맡게 되었고, 총무는 한때 나와 같이 조립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서명희가 맡았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마산 시내에 있는 조용한 찻집에서 만나 본격적인 작품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찻집은 부림시장 입구에 있었던 새삼공다방(지금은 없어졌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장 간부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몸이었지만 다른 동인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 당시 자유문학동인들 대부분은 창원공단에 있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여전히 공장 간부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잔업근무를 피해가며,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다. 나 또한 공장 간부들의 그물망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보안대 신사(?)의 보이지 않는 검은 손길을 조심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후딱 흘러가고, 두 달이 거의 다 흘러가도록 나는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나오기만 하면 금세 내가 바라는 직장(출판사 편집부나 잡지사 편집부 혹은 신문사)이 생길 줄 알았지만 막상 공장 밖의 세상은 내 생각처럼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매일 아침마다 신문에 난 '사원모집공고'를 꼼꼼히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내가 갈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다 싶어 전화를 걸면 그곳은 대부분 세일즈를 하는 곳이었다. 사출공이나 선반공을 구하는 모집공고는 많이 나와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공장생활은 하기가 싫었다.

하긴 공장에도 꼭 한 군데 가긴 갔었다. 그곳은 양산에 있는 사출공장이었는데, 사출기를 다룰 줄 아는 간부(관리과장)를 찾는다고 해서 갔었다. 그래도 관리과장이란 직책을 달고 있으면 그나마 공장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 공장은 전체 규모가 내가 다닌 사출실보다 조금 더 큰, 가내공업 수준이었다.

그 뒤 나는 부산 중앙동에 있는 세일즈를 하는 회사에 잠시 다녔다. 그 회사는 백과사전을 파는 유명한 회사였는데, 그때 나는 그 회사가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그런 곳인 줄 알고 입사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교육비까지 내고 일주일쯤 교육을 받고 보니 백과사전과 방짜 등을 판매하는 그런 회사였다.

그때 나는 6개월 정도 그 회사에 다녔다. 창원에서 부산까지 교육을 받으러 다닌 1주일이란 기간도 아까웠지만 무엇보다도 집에서 빈둥빈둥 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워낙 교육이 철저했던 탓에, 리더북을 넣은 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마구 헤매다가도 그 회사 근처에만 가면 금세 몇 건을 올릴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성큼 다가오자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하면 놈팡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 당시 사출공장 여기저기에서는 내게 손짓을 더러 하고 있었지만 곧 죽어도 공장에는 다시 가기가 싫었다.

1986년 여름, 나는 마침내 서울로 올라갈 결심을 굳혔다. 그날 나는 당장 입을 옷가지 몇 개와 그동안 내가 사출실에서 쓴 시 원고뭉치를 넣은 조그만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부산역에서 영등포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그때가 아마도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었던 나는 밤차를 타야만이 하루 여관비를 아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여 아현동이나 봉천동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조그만 달셋방 하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어둠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리는 그 열차 안에서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 차창 밖에 언뜻언뜻 비치는 불빛 속에 내 8년 동안의 공장생활이 주마등처럼 자꾸만 스쳐 지나갔다. 불안했다. 사실, 친척 하나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고 있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쩌자는 말인가. 이대로 서울에 올라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앞으로 서울에서 무엇을 하며 식의주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쌀과 밑반찬은 집에서 보내 줄 것이다. 근데, 매월 다가오는 방세는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가. 우선 급한 김에 막노동이라도 할까.

나는 서울로 달려가는 그 열차 안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속으로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노랫가락 속에 나의 8년 동안의 고된 공장생활을 하나 둘 다시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새롭게 다가올 서울살이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 둘 털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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