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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종칠뻔 했던 야구와 내 인생-그래도 그 시절 쏘다니며 놀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마터면 종칠뻔 했던 야구와 내 인생-그래도 그 시절 쏘다니며 놀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 여행스케치

시골길을 혼자 다니는 건 별 재미가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빈 지게 다리를 ‘탁탁’ ‘톡톡’ 작대기로 두들긴다. 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다. 심심함을 싹 가시게 하기엔 역부족이다. 돌멩이가 발에 채이면 가던 길을 멈춘다. 주먹돌을 주워 한 손으로 띄우고 지게 작대기를 사정없이 휘두른다. 첫 번째 볼! 두 번째도 보기 좋게 빗나간다.

바닥에 떨어진 돌을 보고 자신의 실력 없음에 한탄한다. 자존심에 먹칠을 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삼세 번까지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적당한 높이로 던져 올리고 얼른 작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힘껏 치자 감기듯 넘어질 듯 휘청휘청. ‘딱!’ 소리와 함께 개울로 휘휘 돌며 날아간다. 물장구가 쳐지자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이런 꼬맹이들 놀이의 기원은 무엇일까? 바닥에 있는 작은 자를 튕겨 개잡기, 수비가 구멍으로 던져주는 작은 자를 되받아치기, 긴 자를 들고 있는 손에 작은 자를 살며시 던져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치는 방법 등이 있는데 공통점은 멀리 쳐내는 자치기다.

우린 작대기나 긴 막대기만 보면 뭔가를 쳐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풋감이 마파람이나 태풍에 떨어지면 툭 쳐낸다. 생감물이 빠지지 않아 옷은 언제나 감물 투성이었다. 여름이 깊어 가면 똘배를 따와서 멀리 날려보내기도 했다. 그 기분 얼마나 짜릿했던가.

개중 가장 자주 갖고 놀았던 것이 돌이니 간혹 이웃집 장독을 깨기도 하고 어른들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 집안 간 싸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깡촌에 TV가 보급되던 1978년 4학년 때부터는 건전한 놀이로 전환하였으니 그게 바로 야구다.

조선 최초 야구경기를 다룬 영화 < YMCA야구단 >은 1905년 벌써 개화기를 거쳤지만 우리 마을은 그제서야 눈을 뜨게 된다. 라디오로 중계를 해주던 때까지 우린 야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전설의 고교야구가 한창일 때도 잠자고 있었던 동네다. 세광고, 선린상고, 대구상고와 대구고, 부산상고, 천안북일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에 선동렬의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한창이던 때다.

아나운서는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의 생생한 광경을 빠른 목소리로 전달했다. “열광의 도가니! 도가니!” “쳤습니다. 홈런!” 늦여름 봉황기가 시작되면 예선 없이 전국의 60여 팀이 모두 참가하는데 그 때 등장한 신흥명문이 광주 진흥고다. 동향이라는 점과 김정수 선수의 원맨쇼에 매료되었다.

야구(野球)! 나에게 둘도 없는 스포츠다. 내 인생을 뒤바꿔놓은 이 경기에 나도 휩쓸려 살았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아버지 출타 시에는 꼴망태에 라디오를 넣어서 논두렁 베는 도중 옮겨가며 중계를 들었다. 집에선 스피커가 달달달 떨며 찢어지도록 볼륨을 최대로 높여놓고 쇠죽을 쒔다. 주말 이틀은 옆집 TV를 껴안고 살았다.

그 시절 야구는 그냥 넓은 들[野]과 둥근 공[球]만 있으면 되었다. 방망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긴 게 없으면 빨래 방망이라도 갖고 놀았다. 돼지오줌보를 차고 놀았던 아이들 아니던가. 촌구석에 야구가 보급되면서 대대로 내려오던 놀이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 역적노릇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만큼 매력 덩어리가 야구다.

닫혀 있던 마을도 5학년이 되던 해 몰라보게 변화하고 있었다. 저수지라기엔 규모가 몇 배나 큰 송단제를 굴착기, 불도저, 대형트럭이 들어와 막기 시작했다. 인근 다섯 마을 사람들로도 부족해 외지에서도 실려 오고 한밭집이 들어섰다. 어른들은 현금을 맛보는 재미에 집안 살림을 등한시 했으니 아이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4학년 가을 광주 야간상고에 진학한 동네 형들이 배트, 실밥 있는 공, 글러브와 포수미트 및 마스크를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숫자가 부족했기에 곧바로 멤버가 되었다. 벼를 벤 허허벌판 눈이 꽁꽁 얼어붙은 논배미에서, 저수지를 막기 위해 길을 넓히다 하천부지를 득득 긁어 평평하게 다져놓은 공터로 옮겨 다니며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돌밭과 얼음이 언 논에서 형들이 던진 공은 살인무기였다. 맨손으로 공을 받다가 얼굴에 맞기도 했으며 서로 하지 않으려는 포수를 번갈아 보다보니 몸 곳곳이 공에 맞아 탱탱 부어올랐고 멍투성이었다.

그 시절의 공은 초기엔 손으로 칠 수 있는 정구공에서 테니스공으로 그 다음이 돌만큼 딱딱한 돌공, 이어 오목하게 들어간 엠보싱공이었고 이 사진에서 나온 실밥이 잡힌 공을 만져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의 공은 초기엔 손으로 칠 수 있는 정구공에서 테니스공으로 그 다음이 돌만큼 딱딱한 돌공, 이어 오목하게 들어간 엠보싱공이었고 이 사진에서 나온 실밥이 잡힌 공을 만져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 김규환
시간은 흘러 5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형들은 글러브와 마스크를 성호에게 맡겼다. 소나무 방망이는 자꾸 부러져 친구들끼리 왕복 시오리가 넘는 골짜기에 가서 박달나무 몇 토막을 잘라와 며칠 물에 담갔다가 말려서 방망이를 예쁘게 깎았다. 세 개를 만들어 니스 칠까지 하여 애지중지 다루던 하나를 들고 초등학교로 갔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박달나무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시멘트 화단 모서리에 번갈아가며 사정없이 쳐서 부러지는가 말짱한가를 실험하기에 이른다. 약간 패일 뿐 꿈적도 않는 박달나무 방망이. 결이 고르고 단단하며 탄성이 대단했다. 공이 맞는 순간 ‘딱!’하는 경쾌한 음이 들리고 학교 담장을 넘기는 일도 있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무척 더웠다. 새마을 모자를 안 썼더라면 머리가 벗겨지고 2~3분을 버티지 못해 언제 누가 쓰러질지 모르는 팍팍 찌는 무더위였다. 이웃 동네 아이들이 몰려오자 연습을 그만 두고 2시 무렵 바로 경기에 들어갔다. 젖 빨던 힘까지 짜내 동네 대항 1000원 따먹기 내기 야구시합을 했다.

포수와 1루수만 글러브를 끼고 5학년 아이들만 7명씩 시합을 벌이는데 투수는 수시로 바뀌었다. “야 색꺄 한 개만 더 던지고야…” 하면 “딱 한 개다” 하며 다음 투수가 대기한다. 자리 이동이 잦았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공을 던지면 곧바로 교체된다. 꽃밭에 들어가 공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실제 경기한 시간보다 많았다.

파울볼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교실 지붕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은 공 찾느라 갖은 애를 썼다. 200여 미터나 냇물에 떠내려가는 공을 찾아오는 수고를 감수한다. 유리창을 깨면 아이스크림 사먹을 1000원을 털고도 부족해 더 걷기도 했다. 엠보싱 공, 독공을 가까스로 찾으면 다행이고 못 찾으면 경기가 중단된다. 게임 자체도 무기연기 된다. 파울볼 때문에 공을 자주 잃자 파울볼 다섯 개면 죽게 하는 자체 룰을 만들기까지 했다.

1회 초 상대편이 먼저 공격을 했다. 유격수와 3루수를 함께 본 나는 송구가 정확하다. 어깨가 지게로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삼자범퇴로 간단히 끝났다. 1회 말 상대 선수들의 요지경속에 성호가 3점짜리 그라운드 홈런을 날렸다. 일순간 3-0. 2회, 3회를 거쳐 11-2로 벌어졌다. 상대 실책 때문이었다. 도루가 아예 금지된 야구다.

회가 흘러 7회 초가 시작되었다. 해섭이가 던진 공은 투수가 던진 공이라기보다 하늘로 솟구치는 뜬공이었다. 포볼로 내리 세 명이 나가 만루인 상황에 내가 전격 투입되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 볼, 연거푸 스트라이크. 힘껏 던져 간단히 한 명을 막았다. 이어 4번 타자 상복이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볼-볼 세 개가 볼이었다. 밀어내기 상황에 맞춰 잡을 생각으로 한가운데에 직구를 꽂아 넣었다.

“볼!” 정확히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볼이란다. 모두 몰려가 항의를 했다.

“야 새끼야! 심판 이딴 식으로 볼래?”

“뭐 색꺄? 볼인께 볼이라 한 것인디….”

“좆만은 새끼. 니 배꼽 근처로 왔는데 그게 어째 스트라이크가 아니라는 거냐?”

순식간에 판정 시비가 벌어졌다. 인원이 부족하여 주심을 공격팀에서 양심껏 보기로 한 동네 야구판이다. 한참을 지켜보던 나도 던진 위치를 정확히 되짚어가며 부당성을 설명했다. 당시까지 순둥이였던 내가 따질 정도였다면 상대편이 실수를 했거나 지는 걸 모면하기 위한 술책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일찍이 없던 일이다.

심판이었던 상연이에게 실수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무슨 뭉퉁한 것이 내 뒷덜미를 치는 게 아닌가. 아무도 말릴 틈도 없었다. 저항 없이 허공을 날아온 그 단단한 방망이는 내 숨골을 가격했다. 나는 그 자리에 곧바로 쓰러졌다. 나중에 아이들 말에 따르면 그 이후 20여분 동안 눈을 하얗게 뜨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꼴 벨 때도 떡약 건전지 붙은 라디오를 망태에 넣어 가거나 집에서 소죽 쑬 때도 마루에서 아래채 쇠죽솥단지 옆에 두고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볼륨을 최대로 높여놓고 일을 했습니다. 잠시도 떠나지 못했던 그 때 야구는 참 즐거웠습니다.
꼴 벨 때도 떡약 건전지 붙은 라디오를 망태에 넣어 가거나 집에서 소죽 쑬 때도 마루에서 아래채 쇠죽솥단지 옆에 두고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볼륨을 최대로 높여놓고 일을 했습니다. 잠시도 떠나지 못했던 그 때 야구는 참 즐거웠습니다. ⓒ 여행스케치

소사아저씨를 불러와 응급조치를 하고서야 움직임이 있는 나를 들것에 실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 2학기가 되어도 학교에 등교하지 못했다. 2주에 한번 꼴로 학교에 가서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만을 확인시켜주고 돌아왔다.

6학년 졸업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수업시간에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이 스르르 쓰러져 거품을 물기도 했고 집에서는 몽유병 환자처럼 쏘다니는 위험한 순간을 수백 번 넘기기도 했다. 그 뒤로 내 성격은 아주 괴팍해졌고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바닥에 쓰러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조금 차도가 보이던 2학년 여름 방학 때는 수학 선생님 초청으로 마을 아이들 전원이 무등경기장으로 해태 타이거즈 팬이 되어 프로야구를 보러 갔다. 그 날따라 전주경기가 펼쳐져 못내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막 나눗셈을 배우려던 때 다쳐서 나눗셈을 중학교에 가서 배우는 웃지 못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니 줄곧 수학이라는 놈과는 담쌓고 살았고 고3학년 1학기 말과 2학기 초 모의고사에서 인문계열 배점 55점 중 연거푸 14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받았다.

해태 골수팬이 되어 해태 껌 아니면 먹지도 않던 전라도 아이는 대학 진학 후 광주민중항쟁과 학생운동, 민중운동을 경험하면서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 놈의 야구 판에서 그렇게 놀지 않았던들 중학교 2학년 가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불효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축구공이 귀하던 시절 짚으로 만든 공과 내가 차고 놀았던 돼지오줌보 말린 것
축구공이 귀하던 시절 짚으로 만든 공과 내가 차고 놀았던 돼지오줌보 말린 것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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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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