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병역특례가 끝난 뒤 나는 이곳 저곳에 여행을 다니며 내 앞날을 고민했다. 창원 성주사못에 서 있는 나
ⓒ 이종찬
"니 우짤끼고?"
"뭘 우짠다 말이고?"
"내 말은 이대로 공장에 계속 눌러 앉아 있을 끼가 그 말이다."
"일단 올 겨울을 넘길 때까지는 이 공장 기름밥을 먹어야 안 되것나."
"용접실에서 일하던 글마 안 있더나? 글마 그거는 00중공업에서 스카웃이 들어와가꼬 며칠 전에 글로(그 곳으로) 갔다 카더라."

1985년 12월 말, 나는 마침내 창원공단 공장생활 7년 10개월 만에 그 아슬아슬하고도 지긋지긋했던 병역특례기간을 무사히 끝낼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동안 철창에 갇혀 생활하는 것과 같았던 그 공장생활을 끝내고 언제든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도 되는 자유의 몸이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죄수 같은 푸른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기름때에 절은 내 몸을 맑은 물에 담가 와이셔츠처럼 하얗게 빨고 싶었다. 그동안 내 왼쪽 가슴에 낙인처럼 찍힌 공돌이란 이름표를 떼고 다른 이름표를 붙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새로운 이름표를 보아란 듯이 주변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병역특례기간만 끝나면 내 세상이 올 줄 알았다. 아니, 내가 원하는 이 세상의 무지개 빛 모든 꿈들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저절로 내게 다가올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시인이란 이름표까지 하나 더 달고 있었으니, 내가 공장을 그만두기만 하면 여기저기에서도 원고청탁이 마구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길고 긴 병역특례기간이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푸른 작업복을 입고 사출실에서 신제품 시험생산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틈틈이 사보 기사도 써야만 했다. 그동안 기대를 잔뜩 했던 것과는 달리 월급도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어떤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니기미! 병역특례가 끝나모 월급도 올려주고 승진도 시켜준다꼬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들어쌓더마는 그기 말짱 도루묵 아이가."
"니,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이다. 시방 우리 공장 명줄이 까딱까딱하고 있는 마당 아이가. 그라이 짤리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 고맙다꼬 생각해라."
"아이구, 내 팔자야! 우쨌거나 병역특례만 끝나고 나모 숨통이 쪼매 트일 줄 알았는데 이거는 도대체 우째된 일인지 갈수록 태산이니."

그 당시 내가 다니는 공장은 바람만 살짝 불어도 곧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우리 공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00화약이라는 그룹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우리 공장 현장노동자의 절반이 잘릴 것이라는 그런 무시무시한 말들도 은밀하게 떠돌았다.

병역특례가 끝난 뒤부터 내 마음 또한 공장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공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가까운 공장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다손 치더라도 결코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제의가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나는 우선 공단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시를 쓰면서 살고 싶었다. 공작부 황복현 과장의 말마따나 시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를 시인으로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는 그동안 잡지 서너 곳에 시 몇 편을 겨우 발표한 신출내기 삼류시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어릴 때처럼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롭게 현장을 누비며 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시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시의 길은 그 모습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게다가 지방에서 별다른 직업도 없이 시를 쓰면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오죽 했으면 마산에 살면서 시를 쓰고 있는 시인 최명학은 “시가 밥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시까지 썼겠는가.

"니 시만 쓰다가는 그대로 굶어죽거나 거렁뱅이 되기 십상이다. 그라이 정 공장생활이 엉글징 나모(몹시 싫으면) 조그만 출판사나 잡지사에라도 댕기면서 시작활동을 하는 기 좋을끼다."
"그것도 뭘 알아야 할 꺼 아입니꺼?"
"니는 그동안 책도 많이 맨들어 봤다 아이가. 그라고 지금도 사보기자로 일하고 안 있나. 출판사나 잡지사라카는 기 다 그렇고 그런 기다."

그때 내 주변에 있었던 문단 선후배들도 내가 곧 공장을 그만둘 것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 긁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갈 곳은 눈을 몇 번씩이나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마산이나 창원에 몇 몇 인쇄소가 출판사나 잡지사를 겸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자비를 들인 그런 책을 찍어주고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공장을 떠나 출판사나 잡지사로 향하고 있었지만 몸은 공장에 매여 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공장에 그대로 있자니 불안하기도 한데다 좀이 마구 쑤시고, 막상 공장을 그만두자니 밥벌이를 할 만한 마땅한 직장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사출실에 앉아 더욱 열심히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와 내 동료들이 직접 겪은 공장생활은 물론 내 고향 창원의 기름진 땅이 반강제적으로 공단에 편입된 뒤 그 원형이 하나 둘 부서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태어난 자란 고향 창원의 옛모습을 그 어떤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기도 했다.

몇 해 전
풀뿌리 캐먹으며 줄줄이 자빠지던
그 험한 보릿고개에도 끄떡없이
피 붙히며 살았다
오랜만의 풍년농사 잘 끝내고
밀려오던 빚도 좀 갚아 든든했다
그런데 이 외진 문둥이 땅에도
조국근대화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려왔다
대대로 이 마을 노인들 죽을 자리 보던
앞산 뒷산
불도저로 겁없이 마구 깎아
조상뼈 묻힌 산 흙으로
벼들이 아야 아야 소리칠 것 같은
기름진 논들을 장난처럼 처억처억 덮었다
검은 하늘에선 마른 번개가 치고
때 이른 싸락눈이 하얗게 내리 꽂히는 데도
불도저의 날카로운 삽날은
무디어갈 줄 몰랐다

-이소리 '밀리는 고향' 모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