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

공주의 예견대로 에인은 한잠도 자지 않고 사랑만 계속했다. 물 마실 틈도 과일을 먹을 틈도 가지지 않고 끊임없는 사랑만 했다. 그는 자기 몸에 그런 열락의 샘이 있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 절정을 순간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잇고 싶어, 아예 닌의 몸속에서 웅지를 튼 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곳도 천상이 아닌 지상의 한 귀퉁이었다. 새벽이 오고 또한 해가 밝아 왔다. 그는 다시 닌을 끌어안으며 그녀 이마에 덮여진 머리를 걷어냈다. 해가 그녀 얼굴을 비추었다.

"아, 아니, 그대는…."

그때의 햇빛은 그에게 너무도 잔인했다. 그가 밤새껏 탐했던 여인은 신녀도 선녀도 아닌 열 다섯살짜리 소녀 닌이었다. 그가 참담하게 쓰러져 눕자 닌이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기는 니푸르가 아니에요. 이제 우린 맘껏 사랑을 할 수 있지요."
"닌, 그대는 언제 여기에 왔소?"

그가 한참만에 물었다. 닌이 사향내가 나는 입김을 후후 불어내며 대답했다.

"장군님과 함께 왔지요."
"그렇다면 부두에서 함께 배를 타고 온 그 청년이…."
"밤마다 장군님께 이불을 덮어주고 또한 발을 풀어드리기도 했구요."
"그런데 왜 애초부터 그대라고 밝히지 않았소?"
"호송원들 때문이었지요."

"호송원들 때문에? 그럼 그대는 정말 나를 구하기 위해, 저 세상으로 보내지 않고 이리고 이끌기 위해서 그렇게 변장을 했더란 말이오?"
"설령 저 세상으로 간다고 했어도 저는 장군님을 따라왔을 거예요."

그 순간 에인의 가슴 속으로 이해와 감사의 마음들이 한줄기로 스며왔다. 그러자 잠이 쏟아져왔다. 그는 닌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날 오후 엔키는 다시 연회장으로 에인을 초청했다. 공주에게는 닌을 데리고 나들이를 가라고 설득했으니 에인만 올 것이었다. 그는 음식도 술도 미리 차려놓고 에인을 기다렸다. 미소년도 일찍 도착해 비파를 뜯게 했다.

한낮의 열기도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마침내 에인이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엔키는 비파의 선율을 높이라고 미소년에게 눈짓을 보낸 뒤 에인 쪽으로 다가갔다.

"늦으셨습니다. 어서 식사부터 하시지요."

엔키는 에인이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도 점심도 거른 채 잠을 잤던 것이다.

"거, 맥주부터 한잔 주시구려."

오늘은 에인이 먼저 술을 청했다. 엔키가 잔이 넘실거리도록 술을 따라 공손히 건네주었다. 에인이 목이 말랐던지 그 술을 단숨이 들이켰다. '술과 여자에는 숙달 기간이 필요 없는 것이지…'엔키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러나 에인은 술잔대신 음식 접시를 끌어당겼다. 무척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예, 그건 구운 쇠고깁니다. 요리사에게 특별히 부탁했으니 장군님 입에도 맞을 것입니다."

접시가 비어져갈 때 엔키의 조바심이 다시 신호를 보내왔다.
'오늘은 시간을 끌지 않아야 한다, 공주가 나들이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 전에 내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엔키는 술잔을 비우며 생각을 거듭했다. '장군에게 보여줄 것은 가장 소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장군의 마음을 더 빨리 끌어당길 수 있다. 그래, 역시 봉무(鳳舞)다. 국조 일에 추어지는 춤…' 그는 소년에게 지시했다.

"봉무 곡을 뜯어라."

소년이 곡을 뜯기 시작했다. 취기도 적당한데다 비파소리에도 흥이 실릴 때 그는 벌떡 일어나 팔을 크게 쳐들고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의 갑작스런 동작에 에인은 또 적이 놀라고 있었으나 그의 춤 동작을 보고 이내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엔키는 봉이 하늘을 나르듯 활개를 벌려 춤을 추었고 그때 소년은 현을 뜯으며 어설프나마 다섯 가지 울음 음조를 만들어 냈다.

엔키는 물론 알고 있었다. 본래 이 춤은 북과 종, 경쇠와 피리, 날라리로 합주를 하는 것이며 그러면 오색의 넓은 소매를 벌려 너울너울 춤을 추고, 때로는 옷자락 전체를 벌려 하늘을 나르듯이, 때로는 각양각색의 날개 짓으로 화려한 안무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득 격식을 다 갖추지 못한 자신의 춤이 상대에게 어설픈 흉내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이 춤은 오색의 넓은 팔소매가 그 생명인데, 자신의 지금 의상은 그저 밋밋한 소매일 뿐이다. 이런 소매통을 아무리 펼쳐봐야 날개로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춤을 중단하기 위해 팔을 더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몇 바퀴 빙글빙글 돌다가 에인이 앞으로 와 사뿐히 날개를 접는 것으로 춤을 끝냈다.

"다 추진 못했습니다만… 이 춤을 아시는지요?"

그는 자세를 바로 잡고 앉으며 에인에게 물었다.

"소호 시조의 축일이면 궁정에서 그 춤을 추지요."

에인이 대답했다. 약간 열에 떠 있는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엔키의 춤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해마다 그 춤을 보아왔고 따라서 거기에는 다른 악기는 물론, 병풍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병풍이 연주자들 뒤를 가려주어야만 음향이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않고 춤추는 사람에게로 고스란히 모아지며, 그래야만 춤추는 사람이 한결 더 사뿐사뿐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음악이야 사정상 다 갖추지 못했다 치더라도 춤 또한 썩 훌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엔키의 춤은 다른 것도 아닌 봉무(鳳舞)였다. 처음은 껑충껑충 뛰기만 해서 무슨 춤인지 몰랐지만 팔로 날개짓을 할 때 그 춤이 봉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였다. 에인의 머리꼭지에서 태왕의 말이 번개처럼 번쩍 하고 떠올랐고 뒤이어 '텅'하는 천둥소리가 등에서 울렸다. 그는 얼른 등뼈를 세웠다. 태왕의 말소리가 등뼈를 타고 올라 정수리에서 쏟아져 내렸다.

'신족에게는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떤 지시의 힘이 따로 있고, 그 지시의 힘이 자신이 바라지 않는 길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그때부터 의문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처지도 그런 영향인가? 어째서 나는 타곳의 재판관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었으며, 또 이곳까지 흘러
왔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의 과정인가. 이것도 신이 준 길이며 또 지시인가?

엔키가 뜨거운 눈길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다음 언제 이 춤을 제대로 다시 보여드리지요."

에인은 이제 그만 혼자가 되고 싶었다. 혼자 명상에 잠겨 그 의문들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한 것은 이 멜루하가 자기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얼마이든, 그 시간의 길이에도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시간도 결국은 스스로 꼬리를 잘라내는 법, 그날까지 자신은 신족의 도리만이라도 꽉 잡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비록 그것을 지탱시켜주는 지휘 검이 없어도 그래야 하는 것은, 그마저 놓치면 자신은 한갓 빈 인간의 육신으로 타향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궁극적인 공포는 바로 그것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