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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특례가 끝나갈 무렵, 내가 다닌 공장에서 동문체육대회를 마치고
ⓒ 이종찬
"너, 병역특례가 끝난다고 아예 기름밥까지 끊을 셈이야?"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더."
"어쨌거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막상 기름밥 끊어봐. 당장 뭘로 먹고 살래. 그렇다고 난전에 나가서 장사라도 할 셈이야?"


그랬다. 나는 1985년 12월 말까지만 별 탈 없이 견디면 그 지긋지긋한 병역특례기간을 무사히 끝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공작부 황복현 과장의 말마따나 막상 병역특례가 끝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를 좀 더 나은 대우로 데려가겠다는 다른 공장 간부들의 제의도 없었다.

그 당시 공장 간부들은 병역특례가 끝나가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은근히 불이익을 주면서 스스로 퇴직을 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7~8년 이상 근무한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공장간부들이 걱정했던 것은 노조 문제였다.

공장에 오래 근무한 병역특례자들은 공장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공장 간부들이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일들, 예를 들자면 어용 노조를 만든다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늙은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데 당장 병역특례를 마친 현장노동자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속내까지 잘 알고 있는 병역특례를 마친 현장 노동자들의 눈이 있는 이상 공장 간부들은 그러한 일들을 일사분란하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다가는 자칫하면 병역특례를 마친 현장 노동자들을 중심 축으로 하여 공장 내 민주노조를 설립하게 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아이고! 인자 쪼매마 더 참으모 된다 아이가. 인자부터 내는 죽었으모 죽었지 더이상 공장 생활은 못 하겄다. 니는 병역특례가 끝나모 우짤끼고?"
"글쎄요?"


그때 나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만 들뜨기 시작했다. 우선 지옥과도 같은 이 공장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무언가 뾰족한 수가 생길 것만 같았다. 그동안 넌덜머리가 나도록 일한 공장 생활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때부터는 블랙칼라가 아닌 화이트칼라가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병역특례가 끝나가고 있었던 현장 노동자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푼 되지 않는 퇴직금이라도 타서 공장 주변에 포장마차를 차리거나 아니면 시장 바닥에 나가 장돌뱅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공장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만둔 선배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조그만 공장에 그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 과장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간 선배노동자들 일부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때문에 금세 그만 두었다. '생산과장 000'이라고 적힌 명함은 참으로 그럴 듯해 보였지만 서너 달 단위로 명함이 자꾸만 바뀌었다.

"구관이 명관이라카이. 그라이 니는 꼼짝 말고 한 우물만 파라. 내처럼 맨날 이 공장 저 공장 기웃거리는 날파리 신세가 되지 말고."
"그라모 다시 우리 공장으로 들어오지예?"
"그렇찮아도 내가 노무과장을 몇 번이나 만난 줄 아나. 만나자마자 고마 고개로 짤짤 흔들더라. 내가 받은 퇴직금보다 더 많은 돈보따리로 내밀모 되기야 되것지마는 내한테 그런 돈이 오데 있노."


그랬다. 간혹 그만 둔 선배 노동자가 창원공단에 기생하는 조그만 하청업체를 부나비처럼 떠돌다가 다시 우리 공장에 취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뒷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그 어떤 지역 유지의 압력이나 돈봉투가 개입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빽이 있거나 돈이 없으면 재취업도 할 수 없는 정말 더러운 세상이었다.

그런 선배 노동자들의 개보다 더 못한 삶을 지켜보고 있는 나 또한 적이 걱정이 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대로 공장에 눌러 붙어 있기도 그랬고, 그렇다고 공장을 그만두자니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또한 나는 황복현 과장의 도움으로 사보 기자에다 프로젝트 팀장까지 맡고 있어서 굳이 공장을 그만두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만약 공장을 그만 두게 되면 한창 새로운 제품 개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사출실은 아예 문을 닫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공장 안에서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사출기를 다룰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사보 기자와 프로젝트 팀장으로 추천한 황복현 과장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너, 병역특례 말년에 너무 자주 시를 발표하는 거 아냐? 그러다가 혹시 공장 간부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쩔려구 그래."
"저도 인자 서서이 문학동네에 길트기를 해야 될끼 아입니꺼."
"너, 그렇다고 시가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


그해, 그러니까 내가 다시 사출실로 부서를 옮겨 8년째의 공장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맞았던 1985년 후반에 마침내 무크지 <마산문화> 4집 <희망과 힘>이 나왔다. 나는 <마산문화> 4집에 그동안 사출실에서 틈틈히 썼던 <첫사랑> 외 노동시 몇 편을 '이소리'란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어 채광석 선생이 편집을 맡고 있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노동의 문학 문학의 새벽>에도 <노동자의 나라> <회장님 오신 날> <공단로에 서서>란 노동시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리고 그 시 3편은 그해 박선욱 시인이 묶은 <한국노동시선집>에도 재수록되었다.

하지만 공장간부들은 내가 여러 잡지에 그렇게 시를 발표하고 있는 줄 아무도 몰랐다. 황복현 과장과 공장 안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남천문학 동인 몇몇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랬다. '이소리'란 필명은 당시 공장에 다니고 있었던 내게는 더없이 편리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심히 시를 썼다. 공장을 떠나든 떠나지 않든 시는 그 당시 내 모든 것의 고향이었다. 그 당시 시가 없었다면 나는 그 기나긴 병역특례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시가 있었기에 스스로 참는 법을 배웠으며, 이 더러운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망가진 *바이트를 간다
쇳가루가 덮힌 생산부 뜰에서도
푸르게 짙푸르게 자라나
빨간 꽃잎 피우는 장미를 보며
저들의 능란한 두뇌보다
훨씬 재빨리 돌아가는 그라인더에
바이트의 이마를 갖다댄다
웽-웽-웽 웽-웽-웽
또다시 눈알 빠지고 목 잘려
저 장미꽃잎처럼 붉은 피 뿜으며
초주검 되어 돌아와도 좋다
항상 따스하고 포근하게
너의 칼날 더 날카롭고 단단하게 세워주마
웽-웽-웽 웽-웽-웽
응급 싸이렌 울리는 *그라인더 앞에 서서
마빡이 깨어지고 문드러진
바이트의 칼날 다시 세운다

*바이트/쇠를 깎는 뾰쪽한 도구
*그라인더/바이트나 금속을 연마하는 회전용 기계

-이소리 '바이트를 갈며'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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