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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1일, 스페인 아토차 역 부근에서 발생한 열차폭발 테러로 인해 무고한 인명 200명 이상이 숨졌고, 18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만일 기차가 연착하지 않아 아토차 역에서 폭발물이 터졌다면 출근시간과 겹쳐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훨씬 끔찍할 것이었다.

당황한 집권당의 아스나르 총리는 테러가 스페인 국내의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 규정했고, 관영언론도 이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으나 그들의 '거짓말'은 성난 민심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국민과 야당은 그 테러가, 이미 수차례 공개적으로 테러를 경고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치러진 총선에서, '이라크의 스페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은 야당은 손쉽게 승리하여 집권하였고, 총선공약대로 4월 27일을 기하여 이라크의 스페인군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로부터 1년 전인 2003년 3월 20일, 국민 90%의 압도적인 파병 반대여론과 유럽 대부분 국가의 파병불가 방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스페인의 아스나르 총리는 부시, 블레어와 함께 일약 세계적인 뉴스 메이커로 떠올랐다.

초강대국 미국, 영국의 정상과 함께 3자회담도 하고 만면에 웃음을 짓고 악수하는 사진도 찍으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영달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대다수의 지식인에게는 냉소와 우려만 자아냈다. 그리고 1년 후, 아스나르가 스페인과 스페인 국민, 스페인 역사에 끼친 공적 결과는 너무도 끔찍한 것이었다.

블레어, 아스나르, 부시가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이 채 바래지기도 전에, 이제 아스나르 총리가 환하게 웃던 사진의 그 가운데 자리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존안이 들어서게 되었다. 1400명이 철군한 스페인의 빈자리를 3000명 이상 파병하여 메워주고, 세계에서도 미국, 영국 다음가는 3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병하게 되었으니 '영광스런' 그 자리에 들어서도 전혀 손색이 없게 된 것이다.

“테러는 반인류적 범죄입니다. 테러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코 테러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읽은 담화문은 그간 국내 네티즌에게 비난을 받아왔던 부시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테러를 규탄하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에는 정작 국민이 알고 싶고,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은 정작 언급되지 않았다.

왜 우리가 '부시의 재선전략 전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한 젊은이를 테러의 표적으로 만들었는지 설명도 없었고, 왜 우리가 자국에서도 비판받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참여해서 테러의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야 하는 지의 설명도 없다.

막상 부시가 파병 이유로 내건 명분은 조사결과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전쟁의 원인자체가 무효화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명분'은커녕 '국익'과 '안보'도 찾아볼 수 없게 된, 이 위풍당당하지만 기이하게 빈약해진 대국민 담화문에는 "내 생명도 소중하다"고 절규하며 고인이 되어버린 망자의 슬픈 넋만 어른거린다.

백 번 양보하여 정부가 진정으로 '이라크의 평화'를 원하여 이라크로 누군가를 보내야겠다면, 정부는 '군인'이 아니라 차라리 '의사와 간호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혹자가 추정하듯 정부가 국민에게 말 못 할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국민을 용병 삼아 거기서 벗어나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부라면 할 짓이 아니다. '전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전쟁'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스페인 마드리드의 솔 광장에는 촛불과 꽃다발들이 열차 테러사건으로 사망한 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스페인 아스나르 정부가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결과다. 대한민국 광화문의 파병반대 촛불이 스페인 솔광장의 촛불처럼 망자들을 위한 것으로 어느새 바뀌어 버릴까 두렵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군대를 파병한다면 우리에게도 스페인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때 가서야 스페인처럼 허둥거리며 군대를 철수할 것인가? 벌써 소중한 국민 한 사람이 희생당했는데, "한 사람 잡혀갔다고 군대 철수하는 나라도 있냐?"고 했다던 어느 국회의원은 그때는 대체 뭐라고 변명할 셈인가?

정부가 국민에게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국민을 이유 없는 사지(死地)로 몰고 가는 극명하게 잘못된 선택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스페인이 결국 대량의 희생자를 내면서 내쳐버린 '이라크 전쟁 파병결정'에 관한 생생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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