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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과 록의 경계는 시간이 갈수록 무의미해지는 추세다. 예를 들어 보자. 미셸 브랜치(Michell Branch)나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은 록 뮤지션인가, 팝 가수인가. 아마 어떤 이는 록 뮤지션이라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팝 싱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니면 다소 절충적으로 '팝-록'이라는 모호한 장르로 구분하는 이도 존재할 법하다.

이처럼 어떤 아티스트의 음악이 팝인지 록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갈수록 까다로운 일이 되고 있다. 음악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떠나, 팝과 록 사이의 경계 해체가 갈수록 가속화되는 추세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오아시스, 블러, 콜드플레이 등의 약진으로 대표되는 '브릿팝'만큼 팝과 록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존재들도 없을 것이다. 사실 브릿팝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호한 것도 없다. 브릿팝은 간단하게 말하면 '밴드가 연주하는 팝 음악'이다.

분명 말랑한 멜로디의 꿀꿀한 노래를 부르는 '예쁘게 생긴' 남자애들(백스트리트 보이스나 웨스트 라이프 같은)인데, 록밴드의 외양을 취하고, 로커의 무대 연출과 행동 양식을 흉내내며 스스로 록 음악을 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한다.

평단은 이들 영국산 밴드들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며, 이들을 싸잡아서 '브릿팝'이라고 분류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중산층 출신 밴드도 노동자 계층 출신 밴드도, 그런지 사운드를 내는 밴드도 챔버 팝에 기울어진 밴드도, 다함께 브릿팝이라는 공통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제 대중들은 등번호로, 아니 그들이 차트에서 거두는 성공의 정도(순위와 판매량)로 그들을 구분한다.

누가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 되니 당연히 원조 타령이 벌어지며, 제2의 비틀즈가 제2의 오아시스를 낳고 너바나와 비틀즈의 조합이니 아바와 너바나의 조합이니 하는 온갖 클론과 안드로이드가 판을 친다. 이 것이 1990년대 브릿팝의 전체적인 모양새다.

2004년 데뷔 앨범 'Hopes and Fears'를 내며 또다시 영국 평단의 "묻지마" 지지를 받고 있는 3인조 밴드 킨(Keane) 역시 브릿팝의 유니폼을 든든하게 차려입은 총각들이다. 이들은 영국 동부 서섹스(East Sussex) 출신으로 1997년부터 카피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즐겨 연주하던 레파토리가 오아시스, 유투(U2), 비틀즈 기타 등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듣기도 전에 '또 오아시스냐' 내지는 '비틀즈 안 듣고 자란 밴드는 없냐'는 핀잔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킨은 절묘한 방식으로 여타 모든 브릿팝 구단 소속 선수들과의 확실한 차별화에 성공한다. 그건 바로,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록 음악과 일렉트릭 기타는 불가분의 관계, 붙어야 사는 순망치한의 관계로 인식되어 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 기타가 '볼륨의 증폭'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악기라는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드럼이나 베이스 기타는 소리를 키워봐야 시끄러울뿐 별 효과가 없지만, 기타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퍼즈, 와와, 딜레이, 페이저 등 각종 이펙트가 등장하면서 가능해진 다채로운 기타 사운드의 활용은 밴드의 음악적 컬러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요컨대, 기타는 록 음악의 특색을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악기인 것이다.

하지만 킨에게는 좋은 선례가 있다. 기타를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경쾌하고 흥겨운 로큰롤을 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 벤 폴즈 파이브(Ben Folds Five) 말이다. 싱어송 라이터 벤 폴즈를 중심으로 한 이 밴드는 키보드와 베이스, 드럼을 이용해 독특한 사운드 질감을 지닌 록 음악을 선보였다. 기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이 밴드만의 색깔을 드러내는데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이다.

사실 록 음악에 있어 기타 사운드는 부가적인 옵션일뿐, 정작 록 음악의 우수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록의 특징인 리듬과 노이즈로 대표되는 사운드 상의 변별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킨은 브릿팝으로 일컬어지는 '멜로디'와 '시어(詩語)'의 밴드가 아니던가. 따라서 기타가 없다는 사실은 밴드인 킨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는 이들이 피아노-베이스-드럼이라는 세팅을 가지고 얼마나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일단 'Hopes and Fears'의 초반부는 만족스럽다. 폭발적 반응을 얻어낸 싱글 "Somewhere Only We Know"나 이어지는 "This Is the Last Time"는 브릿팝의 전형적인 단순한 곡 구성을 취하면서도, 유려하고 매끈하며 인상적인 멜로디 라인으로 근래 나온 어떤 영국 밴드의 음반보다도 강력한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한다.

이어지는 "Bend and Break" 역시 멜로디의 위력으로 치면 앞의 두 곡에 뒤지지 않을 필살의 팝 넘버인데, 특히 전성기의 유투를 연상시킨다는 해외의 평을 주목할 만하다. 그 평대로, 이 곡의 선율과 단순하고 우직한 구조는 U2의 초중기 곡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한편 네번째 곡 "We Might as Well Be Strangers"의 경우엔 역시 한창 때의 엘튼 존(Elton John)을 연상하게 한다. 이걸 보면 킨 역시 영국 록 음악의 유구한 전통을 착실히 계승한다는 점에서 다른 신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초반부 곡들은 '기타 없는 밴드'라는 점을 강조하듯, 유난히 피아노의 진행과 음색에 방점을 찍어 들려준다. 특히 "This Is the Last Time"는 도입부 스타카토로 이어지던 피아노가 이후 홍키통크(싸구려 카바레 등에서 연주하는 래그타임(ragtime) 음악) 스타일로 전환하며 '기타 록 밴드'만큼이나 사운드의 다채로움에 신경썼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피아노 중심의 전개는 5번째 곡 "Everybody's Changing"부터 컴퓨터 음향이 전면으로 부각되면서 다소 뒤로 물러나는 감이 있지만, 음반 전체에 걸쳐 밴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킨에게도 문제점은 있다. 우선 보컬 탐 채플린(Tom Chaplin)의 음색이 유투의 보노와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점은 두고두고 시비거리로 작용할 듯하다. 이는 유투를 카피하던 밴드 초기 시절과도 무관하지 않을텐데, 킨이 인지도를 쌓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인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또한 초반부 강력한 싱글 후보들을 내세워 청자를 휘어잡던 음반이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느낌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는 멜로디-노랫말을 내세워 활동하는 밴드들 대부분의 고민거리일텐데, 킨이 초반부 피아노의 변주를 통해 사운드를 다양하게 연출한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극복 가능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킨은 2004년 데뷔한 밴드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다. 킨의 강점은 이제는 뻔해서 지겨울 법도 한 선율 위주의 브릿팝을 차별화한 부분에 있다. 그리고 그 차별화는 기타가 없는 밴드의 구성, 피아노와 프로그래밍 사운드를 중심에 놓은 독특한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팝과 록이 경계를 지우고 '아무 것도 묻지 말라'며 교류하고 탈주하는 요즘, 킨은 사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기를 포기함으로서 오히려 밴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했다. 이들을 '브릿팝'이라 분류하건 얼터너티브 록으로 구분하건 그건 듣는 이의 자유다.

중요한 것은,그 수많은 무개성 몰자아의 밴드 홍수 속에서 아류나 복제품이 아닌, 독창적이고도 개성 뚜렷한 존재가 되는 일이다. 킨의 이 데뷔작은 그 가능성을 청자가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듣기를 원하는 선율에 실어 상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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