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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6월 17일)오전의 일이 잊혀지지 않아 기록을 해볼까 합니다. 충남 예산의 신례원을 다녀왔습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가톨릭농민회' 운영위원 모임이 신례원 성당에서 있어서였습니다.

올해 7월 18일이 제9회 '농민주일'인데,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가톨릭농민회 소속 농민들이 대전 시내 40여 개 성당 중 20개 성당에 가서 농민주일 강론을 하기로 했지요. 그에 따라 농민주일 강론에 참여할 사람들과 운영위원들이 모여 지도신부님과 함께 준비 모임을 가진 것이지요.

처음에는 먼길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고 바쁜 일도 밀려 있고 해서 가지 않을 궁리를 새벽부터 했습니다. 1970년대 유신시대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해온 처지이지만 실제 경작농민이 아니라는 면구스러움이 묘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또 겪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비가 내리더군요. 일기 예보도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고, 제법 많이 내릴 비 같았습니다. 그 비 때문에 나보다 더 먼 곳에서는 모임에 오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결국 참석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지요.

모임 시간이 오전10시 30분이고 또 빗길 운전이고 해서 여유 있게 가려고 아내를 학교에 출근시켜주자마자 곧바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선 외곽도로 근처에 있는 주유소엘 들러서 내 승합차에 3만원 어치의 경유를 넣었습니다.

연료비는 카드로 결제를 했습니다. '충남교원사랑'이라는 말이 찍혀있는 아내의 농협 BC카드를 내 차에 주유를 해준 아가씨에게 주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정식 종업원인지,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학생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아가씨가 카드 단말기에서 뽑아온 쪽지를 내게 가지고 왔고, 내가 사인을 하니 곧 영수증을 떼어주었습니다.

평소엔 영수증을 확인하지 않고 운전석 바로 옆 홈에다 찔러 넣고 서둘러 주유소를 떠나곤 했지요. 그런데 이 날은 정말 나답지 않게 영수증을 확인해보게 되었답니다. 일이 그렇게 되느라고 그런 건지….

영수증에는 합계란에 2만 원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습니다. 나는 3만원 어치를 넣어달라고 했는데…. 이상해서 주유기 박스를 보니, 3만원이라는 금액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그 아가씨가 단말기에 금액을 입력할 때 3을 2로 잘못 찍은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난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평소처럼 영수증 확인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났더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터였습니다. 또 그랬다면 그 아가씨의 실수 때문에 1만원을 번 셈이긴 하지만 그 사실조차 나는 전혀 모르고 (양심의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 터였습니다.

그러나 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 이상 그냥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섣불리 무슨 행동을 한다는 게 왠지 저어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유소에는 나 외는 다른 차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 아가씨를 부르면 주인이 곧 연유를 알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이 그 아가씨의 실수를 알게 되면 그 아가씨가 무안을 당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순 그냥 모른 척하고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가씨가 무안해지는 상황을 생각해서 내 양심이 불편해지는 쪽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1만원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 아가씨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곧 결단을 내렸습니다.

작고 짧게 두어 번 클랙슨을 울리니, 그 아가씨가 나오기를 바란 내 마음과는 달리 주인이 나왔습니다. 주인은 종업원들과 노상 함께 일하는 40대 초반의 남자였습니다. 그가 내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영수증을 그에게 내주며 금액이 덜 찍혔다고 말했습니다.

영수증의 금액을 보고 주유기 박스에 나타나 있는 금액을 확인한 주인은 기분 나쁜 표정이 되었습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 아가씨에게 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아가씨가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유리창 밖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결코 바라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셈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가씨가 단말기에서 다시 뽑은 쪽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추가로 10,000원이 찍힌 쪽지였습니다. 나는 그 쪽지에 사인을 하며 아가씨에게 말했습니다.

"아가씨, 미안해. 아가씨가 곤란해질 일을 생각해서 그냥 갈까도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러면서 나는 기대를 머금었습니다. 아가씨가 생긋 웃으며, "제 실수로 불편을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여전히 부은 얼굴이었습니다. 내게 영수증을 떼어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금은 무안한 심정이었습니다. 아가씨가 어쩌면 속으로 "바보같이, 일만 원을 번 줄 알았으면 그냥 얼싸 좋다 갈 것이지, 왜 착한 척해 가지구 남을 곤란하게 만들어"하며 나를 흉보고 욕할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그런 괜한 생각까지 하자니 더욱 섭섭하고 씁쓸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가씨, 미안해. 또 만나. 다음엔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어."

이런 인사까지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는 차를 움직였습니다. 곧 큰길로 나아가서 빗속을 달리며 한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또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그러면 무슨 반응이 있겠지….

어느새 이상한 기대 하나가 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한 나머지 다음 번에는 생긋 웃으며, "제가 더 미안하지요. 그리고 고맙구요"라는 말을 하게 되기를….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갖게 되면서 내 마음은 좀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 아가씨의 부은 얼굴이 자꾸만 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주유소에서의 그 짧은 시간의 일들을 찬찬히 떠올려보면서 내 실책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차의 클랙슨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서 주인이 나왔을 때 그 아가씨를 불러달라고 할 걸…. 그 아가씨에게 살짝 카드 단말기 쪽지를 보여주고 주인 모르게 처리를 하라고 할 걸…. 그게 어려웠으면, 주인이 그 아가씨에게 꾸중을 할 때 너무 야단치지 말라고 한마디라도 해줄 걸…. 전혀 세심하지도 기민하지도 못했던 내 실책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고 바람을 불러들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 아가씨를 위해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좀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잠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아가씨에게서 나중에라도 "제가 더 미안하지요. 그리고 고맙구요"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 너무 큰 기대이고 일단 번지수가 안 맞는 것이겠지만, 전혀 가당치 않은 것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주인이 혹시라도 나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면, 그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그 아가씨에게도 나누어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자니 그 아가씨에게서 나중에라도 좋은 인사를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좀더 확실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그 아가씨에게서 밝은 미소와 함께 그 말을 꼭 들었으면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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