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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6·25전쟁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아버지를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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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하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50년 6월 27일

저녁을 드시던 마당. 아직도 아버지는 여기에 살고 계신다
저녁을 드시던 마당. 아직도 아버지는 여기에 살고 계신다 ⓒ 박연규
하루 종일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일을 마치고 마당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워낙 말이 없으신 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게 못마땅하신 지 다정한 말씀 한 마디 건네지 않으신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신 건 알지만 가끔 서운하기만 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시는지 어머니는 더 먹으라며 자꾸만 밥이 담긴 그릇을 내게로 밀어 주신다.

금세 잔치라도 열린 듯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옆집 아저씨네 일을 하는 날이다. 늘 그렇듯 내 일 네 일이 없다. 그래야만 한 해 농사를 마무리 할 수 있다.

저녁을 한참 먹고 있는데, 징 소리가 들렸다. 방위대원 모집을 알리는 징 소리. 무슨 일일까? 어머니는 마저 먹고 가보라 하시는데 나는 그냥 일어나 신작로로 향했다.

신작로에는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시는 어르신들도 나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단 면소재지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그 길로 면소재지(구티)로 출발했다. 그렇게 우리 동네에서 출발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 오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이리 와라….”
“금방 다녀올께요. 들어가 계세요.”

(당시 한 번은‘쿵’하는 소리가 들려 '난리가 난 것이 아닌가'라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지만 전쟁이 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영문을 모르기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왠지 아들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걸 알고 말리지 않을 부모가 있겠는가.)

동네 입구, 해가 넘어갈 무렵 이 길로 고향을 떠나셨다
동네 입구, 해가 넘어갈 무렵 이 길로 고향을 떠나셨다 ⓒ 박연규
같이 간 사람들끼리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그냥 걸었다. 구티(면소재지)까지 걸어가니 다른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와 있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산외면에서 62명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새벽녘에 보은(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으로 걸어갔다.

아침이 밝아서야 보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수십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500~600명 정도가 되었다.

보은 집결지, 지금의 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보은 집결지, 지금의 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 박연규
퇴역한 군인으로 보이는 인솔자가 있었다. 그는 한 번 돌아보더니,

“몸이 불편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몇몇이 앞으로 나갔지만 대충 살펴보고 꾀병부리지 말라며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려 들여보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보은에서 영동으로 나가는 길. 45km
보은에서 영동으로 나가는 길. 45km ⓒ 박연규
보은에서 다시 영동으로 걸었다. 밤을 새워. 가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저 앞사람만 따라갈 뿐이었다.

아침에 영동에 도착했다. 어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예비역 군인의 인솔 아래 50여명씩 나뉘어 4-5일 정도 제식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을 먹고 기차 화물칸에 타고 영동역을 출발했다.

지금의 영동역
지금의 영동역 ⓒ 박연규
도착한 곳은 경산이었다. 경산에서도 훈련은 이어졌다. 또 제식 훈련이다. 단지 장소가 바뀌었다. 이번엔 사과밭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사격 훈련을 하게 됐다.

M1 소총을 50명에 2정 지급 받아 돌려가며 실탄 장착 연습을 했다. 나는 처음으로 총을 만져 보았다. 실탄을 15발 지급받았다. 이것이 내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격 훈련이었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750명 정도가 경산에서 대구로 도보로 향했다. 대구의 어느 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군복과 군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자기에게 맞는 걸 골라 가란다. 고를 겨를도 없이 밀려 잡은 군화가 작았다. 혹시 군화가 큰 사람이 없는지 이리 저리 물어보았지만, 다음날 큰 군화를 신고 있는 전우와 교환하기 전까지 나는 작은 군화 때문에 고생했다.

분대장과 소대장 정도만 현역군인이고 나머지는 나와 같이 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초짜 군인들이었다.

(기본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들이 전쟁에서 살아 남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그것이 어떤 두려움인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도보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나와 동료들은 총기를 지급 받았다. 1박스에 5정씩 들어있었다. 미국에서 바로 날아온 것 같았다. 박스를 열어보니 총 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총 끈은 각자 알아서 달으라고 했다. 나는 헝겊을 찢어서 총 끈으로 달아매었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에는 분해 청소를 해야 했다. 새 총이라 기름이 잔뜩 묻어 있었기에, 모두들 우왕좌왕, 뭘 어쩌라는 건지….

1950년 7월 15일

집을 떠난 지도 보름이 더 지났다. 며칠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전쟁터에 와 있다. 아버지, 그리고 버선발로 따라 오시던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날마다 내게 벌어지는 새로운 일들로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저녁을 먹고 연병장으로 모였다. 이름과 군번을 불러줄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면 안 된다며 단상에서 한 명씩 호명하고 군번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박봉득 9500739!”

무슨 일이 있어도 라니, 섬뜩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모두가 그런 것처럼 건빵 봉지(초칠이 되어 있어 비에 젖지 않았다)에 적어 안쪽에 잘 간직했다.

1사단 11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 2분대.

이곳이 내가 처음 소속되어진 부대이다.

(처음 고향을 떠나는 아버지의 18살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돌아온 사람은 7명중 3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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