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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조봉 줄기에서 바라본 백화산 주산의 6월 모습
ⓒ 지요하
1998년 6월 <태안문학회>를 창립하고 그 해 가을 <태안문학> 창간호를 발간했다. 총 408쪽으로 만들었고 2천부를 찍었다. 이 책에는 창간을 기념하기 위한 '대특집'이 꾸며져 있다. 그 대특집의 이름은 '우리 고장에서의 동학혁명의 모습'이다.

동학혁명 선열들께 드리는 '헌시'와 대특집의 '취지문'을 시작으로 동학혁명에 참가한 이들의 사찬(私撰) 기록들인 '북접일기(北接日記)' 1·2권과 '조석헌 역사(曺錫憲 歷史)', '문장준 역사(文章峻 歷史)'의 내용과 발견 경위, 그 외 여러 가지 관련 사항들을 정리하여 소개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동학혁명의 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선열들 중 태안군에 적을 두었던 총 186명의 명단을 수록했다. 이름과 함께 면(面) 리(里)까지 주소지를 명기했고 '참살 내용'까지 적었다. 참살 내용은 '전사'가 가장 많고, '총살', '화형', '작두형', '생매장' 등이 뒤를 잇는다. 5형제가 한꺼번에 화형을 당한 일과 3형제가 한꺼번에 생매장을 당한 일도 있다. '총상에 의한 사망', '도피 중 익사' 등의 기록도 있고, '집단 살해'로 분류된 이들도 있다.

위에 소개한 사찬 기록들은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지 않고 도피했던 이들이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기억을 되살려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들이다. 하지만 192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여서 그 기록들은 철저히 비밀 작업일 수밖에 없었고, 적발을 경계하여 집 처마의 '용구새' 속에 감춰 보관한 특이한 사연도 지니게 되었다.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들은 사찬 기록들에 대체로 적시가 되었지만, 사망자들의 이름과 참살 내용까지 세세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유족들의 기억 보존 덕분이다. 오랫동안 '역적'이라는 일반의 시각과 문중의 배척, 일제의 감시 때문에 제사도 겨우 물 한 그릇 떠놓고 몰래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유족들은 그것이 의로운 죽음임을 알았기에 참혹한 살육의 내용까지 기억 속에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 태안초등학교 뒤편 백화산 기슭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그 뒤로 보이는 큰 바위가 '교장바위'다.
ⓒ 지요하
태안문학 대특집이 소개한 갑오동학혁명 희생자 186명이 우리 고장에서(충남 태안군) 산화한 선열들의 전체인 것은 물론 아니다. 무수한 희생자들 중에서 우리 고장에 적을 두었던 이들만을 가려서 명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명단 안에 오르지 못한 우리 고장의 희생자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태안문학 창간호 대특집은 1978년 태안 백화산 기슭 교장바위 아래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관련 사항도 소개한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북접 기포지인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의 접주(接主)였던 문장로님의 손자로서 백화산 추모탑 건립에 큰일을 한 문원덕 선생이 제막식 현장에서 직접 낭독했던 긴 '위령문(慰靈文)'의 전문을 수록했다.

아울러 향토사학자 박춘석 선생의 북접 동학혁명 관련 논고와 필자가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에서부터 태안읍 백화산까지 10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밟았던 60리 길을 따라 걸으며 떠올린 동학 관련 생각들을 정리한 '수상문'을 수록했다.

1894년 10월 1일 기포한 북접 동학군은 태안군을 접수한 다음 22일 태안을 출발 24일 해미 승전곡에서 관군·유회군·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하고 당진을 거쳐 예산까지 나아가 또 한번의 대격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28일의 홍주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태안으로 패퇴한 동학군은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한다.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붙잡힌 동학군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죽었을 지는 여러 가지로 상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유족들이 북접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 장소요, 일본군에 의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백화산 기슭에 추모탑을 세운 이유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하다.

현재는 태안여자고등학교 운동장이 차지하고 있는 야산 기슭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무덤이 많았다. 임자 없는 무덤도 많았는데 동학혁명 때 죽은 이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산에다 추모탑을 세워도 무방할 터였다.

하지만 문원덕 선생과 유족들은 백화산 기슭을 고집했다. 그곳이 마지막 항전지이고, 살육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추모탑이 선 자리에서 교장바위는 바로 위에 위치한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태안읍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규모가 관아(현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오늘의 농협 앞 사거리, 동으로는 구세군 자리, 서쪽으로는 구시장 언덕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작은 마을에서 백화산 교장바위는 지척이고 또 질감적으로 상당히 중심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바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체 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충분한 '육감'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읍내와 인접한 백화산 기슭으로부터 가까운 그 두드러진 바위에서 '교장(絞杖)―목 졸라 죽이고 때려죽이는'이 벌어졌다면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보면서 자연적으로 교장이라는 단어와 그 상황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교장의 규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수, 또는 한두 사람이 교장을 당했더라도, 그 교장의 실체적 이미지는 그 순간부터 그 바위와 손쉽게 밀착이 되었을 것이다.

▲ 백화산 '교장바위' 옆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바위 이름의 유래로 1920년대 태안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선생님의 미담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안내판을 철거하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의 일을 소개하는 새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 지역의 여론이다.
ⓒ 지요하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교장바위'로 부르게 되었을 터이다. 그것이 세월을 타고 이어져 내려오다가 1920년대 태안초등학교 일본인 교장의 미담이 크게 발화(發話)되면서 어느덧 손쉽게 '絞杖'이 '校長'으로 바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絞杖'이라는 말은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은 음울함을 지닌 어려운 말이라는 점, 그에 반해 校長은 누구나 쉽게 알아듣는 보통명사라는 점도 알게 모르게 이름으로 선택하는데 작용을 했을 것이다.

백화산 교장바위의 진짜 이름은 絞杖일 개연성이 참으로 크고도 분명하다. 이제라도 絞杖바위로 바로잡는 것이 동학혁명 선열들에 대한 도리와도 부합하고,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스스로 현창(顯彰)하며 향토의 자존심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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