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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5)씨.
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5)씨. ⓒ 심규상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낭인들 대부분이 구마모토(熊本) 사람인 것을 알고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이른바 '을미사변'으로도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어 화제다. 구마모토현 아소(郡) 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5)씨가 그 주인공이다. 가이도시오씨는 지난 10년 간을 명성황후 시해자들의 뒤를 쫓는 일에 몰두해 왔다.

가이 도시오씨의 말처럼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37명의 낭인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가이 도시오씨는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가 구마모토 출신자였는데 이 사람이 미우라고로(三浦梧樓.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조선국 주차공사) 공사의 의뢰에 따라 구마모토 낭인들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이외에도 구마모토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근접해 있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비롯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대의 훈련 양성소 등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역할해 왔다. 지금도 구마모토현내 오오야노바루(大矢野原)에는 자위대 훈련장이 있고 미.일합동군사훈련이 자행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무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또한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 37명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

가이 도시오씨는 “히로시마 재판부의 기록에 의하면 미우라 공사가 외무성의 기밀비를 사용해 낭인들을 불러 모았다”고 말했다. 가이 도시오씨는 “일본정부와 미우라 공사간 사전 모의나 지시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며 “하지만 일본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공사에게 기밀비 형태로 막대한 돈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가이 도시오씨는 “미우라 공사는 일본으로 압송당시에도 수갑조차 차지 않았고 신문을 받는 동안에도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자유롭게 조달하고 편안하게 생활했다”며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도 모두 무죄 석방됐고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신문사 사장 등 중요직책에 등용됐다”고 덧붙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해 가이 도시오씨가 파고 드는 분야는 시해사건에 가담한 40여명의 낭인들 한사람 한사람의 일대기. 그러나 그는 조사과정이 순조롭지 만은 않다고 토로했다. 10년째 추적작업을 벌였지만 사건 가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라 후손이나 무덤을 확인하는 것 조차 쉽지 않다는 것.

하지만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 동안 조사작업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지난 19일,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지역 한 회관에서 가진 가이 도시오와의 인터뷰 요지.

구마모토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돼 왔다. 사진은 구마모토현내에 있는 자위대 군사훈련장(지난 2000년 촬영).
구마모토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돼 왔다. 사진은 구마모토현내에 있는 자위대 군사훈련장(지난 2000년 촬영). ⓒ 심규상
-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연히 자료를 보니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낭인 중 대부분이 모두 구마모토 사람이었다. 구마모토 사람으로써 왜 구마모토 사람들이 대거 관계했을까 의문을 갖고 관심을 갖게 됐다”

- 왜 구마모토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것인가?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가 구마모토 출신자였는데 이 사람이 미우라 공사의 의뢰을 받고 낭인들을 동원했다. 당연 자기가 알고 있는 구마모토 낭인들을 우선 뽑아 올리게 됐다”

- 시해사건과 관련 주된 관심은 일본정부의 사전 지시가 있었는지 등 일본정부의 관련 여부다. 이에 대해 밝혀낸 것이 있나.
“개인적으로 찾아내거나 밝혀낸 자료는 없다. 따라서 시해사건을 주도한 미우라 공사와 일본정부간의 사전 모의나 지시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히로시마 재판부의 기록에 의하면 미우라 공사가 외무성의 기밀비를 사용해 낭인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공사에게 기밀비 형태로 시해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 미우라 공사 등 시해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과정은 공정했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사건의 핵심인 미우라 공사는 일본으로 압송당시에도 수갑조차 차지 않았다. 신문을 받는 동안에도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자유롭게 조달하고 편안하게 생활했다.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다며 모두 무죄 석방됐고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하나같이 중요직책에 등용됐다. 구마모토 신문을 창립한 사람 역시 시해사건 가담자다.”

- 시해사건 중 주로 관심을 갖고 조사 연구하는 분야는 무엇인가.
“시해사건에 참여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사하는 일이다. 어떻게 참가하게 됐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건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아 어떻게 살았고 언제 죽었는지,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그 후손들은 무엇을 하는 지 등이다. 일본이 그저 조선을 침략했다, 식민지화 했다는 것만으로는 침략행위의 죄과를 분명히 알리기 어렵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사람들의 가담과정과 후의 생활을 밝혀 낸다면 진상규명은 물론 일본의 침략적 본성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자를 쫓고 있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5)씨
명성황후 시해자를 쫓고 있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5)씨 ⓒ 심규상
- 언제부터 조사를 시작했고, 지금 어느 정도 진행했나.
“약 10년 쯤 됐다. 하지만 3분의1도 끝내지 못했다. 앞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 어려운 점은 없나.
“듣는 쪽이 일본인이라서 곤란한 것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조사대상자가 모두 사망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후손들은 물론 무덤을 찾는 일조차 쉽지 않다.”

-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건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남은 생동안 조사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 이 일을 하면서 느낀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인근 마을로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사람의 한 후손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후손이 오래된 칼집을 내보이며 ‘선조가 민비를 칼질할 때 쓰던 것’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일본에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얘기하다 분통을 터트리는 경우가 참 많다.

한번은 소학교 교장이 얘기 도중 ‘일본이 조선의 철도를 만들어 줬다. 큰 공장도 만들어 줬다’며 침략을 합리화 했다. 그 자리에서 창씨개명, 군 위안부 등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며 교장과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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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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