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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문학관 분향소에 놓여진 구상 시인 영정.
ⓒ 이성원
이승에서 영원을 노래하고, 오늘을 영원으로 산 구상(85) 시인이 11일 새벽 3시40분 별세했다.

유가족으로는 소설가인 딸 자명(47)씨와 사위 김의규(47) 성공회대 교수, 손녀 향나(19)씨가 있다. 부인 서영옥씨는 1993년 작고했고, 장남 홍씨는 97년 폐렴으로, 차남 성씨는 87년 폐결핵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강남 성모병원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3일 오전 8시며, 장례식은 이날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가톨릭 미사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기도 안성천주교 묘지다.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던 구상 시인은 폐질환으로 지난해 9월부터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았다.

서울 태생인 구상은 4살 때 원산에서 가까운 덕원으로 이사해 성장했다. 도쿄 니혼(日本)대학 종교과에서 수학했으며, 해방 후 고향 원산에서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밤’‘여명도’‘길’ 등을 발표하고, 문단에 데뷔했다.

출생과 성장

구상은 대대로 이어온 반가(班家 양반의 집안)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가 울산 부사였고, 큰아버지가 창녕 현감, 현풍 군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구종진도 궁내부 주사로 있었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순사교습소(경찰학교) 한문 교관으로 있다가 은퇴하였다.

외할아버지도 백두(白頭)진사(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은 사람)였다. 아산 이씨 집안인 외가는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이다. 구상이 결혼 한 후 그의 아버지도 천주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구상에게는 원래 형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구대준 가톨릭 신부가 되셨고, 또 한 분은 동경(東京) 유학 중 동경 대지진 때 행방불명되었다.

아버지가 쉰, 어머니(이정자)가 마흔넷의 나이였던 1919년에 구상이 태어났다. 태어날 때 지어 준 이름은 구상준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외자인 '상(常)'이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어려서부터 돌림자인 준(浚)자를 떼고 불렀기 때문이다.

구상이 태어난 곳은 서울 이화동이다. 일부에서는 함남 원산이 출생지라고 주장하지만 서울 이화동이 맞다.

그가 4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원산시 근교인 덕원(德源)이라는 곳으로 가서 자랐다. 부친은 원산교구에 가서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그 원장을 지내셨다.

▲ 소학교시절(8~9세)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그때 일에 대해 전해지는 한 예화가 있다. 구상이 여덟 살에 그곳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등교 첫날 그의 옷을 보고 전교생 놀렸다. 소학교생인 구상이 양복을 입고 '란도셀'(책가방)을 메고 갔는데 그곳 아이들의 눈에는 우체부로 보였다. 그 이튿날부터는 한복차림으로 나서는데, 어머니가 우겨서 '목세루'(면직물) 두루마기를 입고 책보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은 꼬마신랑 같다며 '알서방'이라고 놀려댔다.

신학교 중등과 시절과 대학시절

구상은 열다섯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만에 환속을 했고, 일반 중학으로 진학했으나 퇴학을 당했다. 마을에서는 주의자(主義者)라며 구상을 낙인찍었다. 그 당시 주의자는 '사상가'라는 뜻보다는 '그 사람 버렸다'는 뜻이 농후했다고 한다.

구상은 몸과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고향을 떠난다. 그후 노동판 인부 노릇도 하고, 야학당 지도도 하며 지내다가 동경으로 떠난다.

동경에 간 구상은 처음 몇 달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급 노동자로, 또는 연필공장 직공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시험을 쳐 두 군데 모두 합격했다. 그 가운데 그가 선택한 것이 종교과였다.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

구상에게 한평생 삶의 지침이 되고, 좌우명이 된 말씀은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구상을 불러 "너는 매사에 기승(氣勝)을 하지 말라! 아무리 의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危害)를 입느니라"며 채근담(菜根譚)을 손수 펼쳐 짚어 보이셨다.

감성일푼편초탈일푼(感省一分便超脫一分)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조금 초탈해 사는 것이니라".

절망의 극한적인 상황 속에 있던 20대 구상에게 신부인 형은 아시시 프란체스코 성인의 말씀으로 위로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 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

원산문학가동맹과 응향(凝香) 필화사건(筆禍事件)

구상이 일본 동경에서의 학생 생활을 끝낸 것은 1941년이었다. 귀국 후 북한 함흥에 <북선매일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46년초 원산의 문학도들은 원산문학가동맹을 발족했다.

당시 신문 지면이나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했던 구상은 자동적으로 문맹 일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조직사업이나 선전행사는 외면했다.

그 무렵 원산문예총 위원장으로부터 해방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받았다. 그는 ‘여명도’‘길’‘밤’ 등의 작품을 제출했다. 그 시편들을 모아 시집 <응향>을 출간했다. 그 시집의 장정(裝幀)은 이중섭 화백이 맡았는데, 표지 그림은 군동상이었다.

이 글을 발표한 직후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 <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현지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총체적인 검열 사업을 벌였다.

백인준의 논평은 <음향>에 대해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반인민적이요" 등등의 수식을 붙였다.

구상은 그 필화사건으로 1947년 2월에 탈출, 월남하였다. <응향>사건은 남로당계 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3호에 대서특필 전재되었고, 이에 대하여 민족진영에서 김동리씨를 비롯해 조연현, 곽종원, 임긍재씨 등이 반론 항의에 나섰다.

구상은 최태응씨가 편집하던 <해동공론>에 북조선문학여담이란 제목으로 사건 경위를 발표하게 되었고, 당시 우익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 <백민:白民>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참하게 됐다.

왜관에서 낙동강 등 소재로 왕성한 시작활동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면서 74년까지 낙동강을 소재로 왕성한 시작(詩作)활동을 했다.

칠곡군은 21년간 왜관에 본적을 두고 활동해 온 우리나라 문단의 거목 구상 시인의 문학관을 2002년 10월 개관했다.

▲ 구상문학관 1층에 전시돼 있는 구상시인 유품.
ⓒ 이성원
문학관 1층에는 구상의 어린시절부터 청년기, 월남 동기,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 활동, 각종 역사적 사건, 문학계 활동, 이중섭, 중광, 설창수 등 많은 지인들과의 교류모습 등을 소재로 한 그의 문학과 발자취, 사진, 서화, 서간문 등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는 구상이 기증한 2만2천여권의 도서가 전시되어 있으며,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독서실도 마련됐다. 천재 화가 이중섭이 잠시 기거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시인 설창수, 오상순 등 많은 문우들과의 추억이 서린 ‘관수재’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2002년 10월 구상문학관 개관기념식에서 사위 김의규씨가 대신 인사말을 읽었다.

"생광(生光)을 누리려는 것이 도리어 과욕으로서, 오늘의 이 신령한 섭리가 저에게 가장 합당한 상태라고 여겨지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이제는 꽤 많은 고금의 문인들의 추모비나 기년관이 건립되고 있으나 그 모두가 사후에 이뤄지는 것이요 생존한 인사들의 문학비 등은 있어도 아직까지 문학관은 자력적인 것이 몇 개 있으나 이번 저의 문학관처럼 완전히 타력에 의해 건립되는 것은 문학사상 최초의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건립지 자체마저도 칠곡군이 시가로 사들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건축 현장에 저는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고 하니….

제가 이 고장에 20년이나 거주하면서 연작시 <밭일기>,<그리스도 폴의 강> 등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이 본적지가 된 향토에 공사간 추호도 기여·공헌한 바가 없고 또한 저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 문단을 비롯해 일반 독자들에게도 애독·애송된다기 보다는 시쳇말로 '뭐 별로'요 오직 80평생을 쓴다는 그 하나로 소위 원로시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실상입니다."


▲ 구상문학관에 걸려있는 구상시인 관련 사진물.
ⓒ 이성원
이는 평생을 강직하고 꼿꼿이 살면서 오로지 시작에만 전념한 구 시인의 삶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에 조예가 깊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세계를 구축해 온 구상은 프랑스 문인협회가 뽑은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본적이 왜관으로 돼 있는 구상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연작시 <강>과 <초토의 시>, <그리스도 폴의 강>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인류의 맹점>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일부는 영어와 불어, 독어로 번역돼 세계인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왜관읍 왜관리 구 시인의 생가를 허물고 건립된 구상문학관에는 11일 고인의 넋을 기리는 분향소가 설치돼 있다.

다음은 장애인 문학 발전을 위해 2억원을 쾌척한 구상이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라는 제목으로 병상에서 미리 쓴 유언장(격월간 <한국문인> 10·11월호에 게재) 중간에 소개한 시 <오늘>의 내용이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칠곡군은 11일 오후 구상문학관 2층에 구상시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분향소를 설치했다.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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