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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이전의 모습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이전의 모습 ⓒ 익산시청

고속철이 개통된 지금의 익산역 모습
고속철이 개통된 지금의 익산역 모습 ⓒ 모형숙
지난 4월 22일 발생한 북한 룡천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에 발생한 이리역(현재 익산역) 폭발사고와 닮은꼴 참사로 익산시에서도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익산시는 지난 27일 ‘룡천역 열차참사돕기 범익산시민운동본부’(본부장 채규정 익산시장)를 결성, 지역유관기관과 시민사회단체, 학교, 종교계 등 50여 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본격적인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북한 룡천역 돕기 창구개설 운영은 오는 7월 23일까지 3개월 동안 익산시청을 비롯해 읍·면·동 29개 장소에 설치되며 전 시민을 대상으로 성금, 물품, 의약품 등을 모금하며 모금된 성금 및 성품은 대한 적십자사에 기탁, 현지로 전달할 계획이다.

또한 익산지역 16개 시민사회단체도 오는 5월 8일까지 각 단체별로 1차 모금운동으로 전개, 한곳으로 모아 익산시나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본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 익산시청
익산지역 원불교 신도들은 지난 24일 ‘용천주민돕기 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성금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기독교 단체에서도 교회별로 모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원광대 총학생회는 지난 27일부터 5월 12일까지 룡천역 주민 돕기 실천주간으로 정했으며 5월 2일에는 익산시 영등동 중앙체육공원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전전을, 5월 6일과 12일에는 촛불집회도 계획 중에 있다.

"조건 없는 도움,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현장서 지켜본 조환구(56)씨

▲ ⓒ 익산시청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구호사업을 펼치며 사고 현장을 기억하고 있는 조환구씨를 만나 그 당시의 모습과 익산시의 지원대책 현황을 들어봤다. 조환구씨는 현재 익산시 춘포면사무소 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사고 당시에는 시청 재무과 회계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조환구씨와의 일문일답.

- 북한 룡천역 대폭발 사고 소식을 접하고 심정은.
"1977년 그 날의 악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창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꽝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를 흔드는 소리에 전쟁이 터진 줄 알았다. 공무원이라 신속하게 시청으로 달려갔다. 시민들은 전쟁이 난 줄 알고 피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당시 모현동 철도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니 온통 칠흑이었고 통곡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너무 어두워서 정황을 살피기는 어려웠지만 다음날 익산역 주변의 상황은 눈뜨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 당시 이리역 주변은 어떠했나.
"모현동은 그 당시 마살매 부락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이야 고속철도가 개통되고 많이 발전했지만 그 당시 사고 지역인 모현동과 창인동 지역은 소매치기도 많았고 노동자와 영세민이 많이 사는 동네였으며 윤락가도 있었다. 그 당시 전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 피해 수습은 어떻게 전개했나.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군인들을 주축으로 도로 복구작업이 펼쳐졌고 현재의 모현 아파트를 이재민들을 위해 재건했다. 전국에서 모포며 의류·라면·의약품 등을 지원해주기도 했고 관심을 가져주는 등 성금이 이어졌으며 재일 동포들은 성금모금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당시 이리역은 낙후된 곳이었지만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익산이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전국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 북한 룡천역 주민들을 어떻게 도와주는 게 가장 큰 위로가 되겠는가.
"북한은 링거병이 없어서 사이다병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아마도 우리나라 60년대 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77년 당시 익산은 지금의 룡천이 겪는 것보다는 조건이 좋았던 것 같다. 의약품과 먹는 것이 가장 절실한데 작은 것도 모아서 큰 힘이 되듯이 서로 서로 협조하며 돕고, 이번 기회를 계기로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같은 민족으로서 정치적 이념을 떠나 동질성을 회복하고 하루 속히 육로가 개방되어 조건 없는 도움, 사랑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익산시에서 본격적인 지원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40대를 전후해서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가족들이 몰살된 경험이 있는가 하면 세 자녀를 잃은 가장의 얘기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현재 춘포면사무소도 28일부터 모금함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동포애와 인도적 차원에서 룡천역과 자매결연을 추진했으면 좋겠다. 7월 23일까지 3차 모집으로 대북 지원 범시민 모금운동을 전개할 방침이다." / 모형숙

다시 보는 이리역 폭발사고
59명 사망·반경 8㎞이내 유리창 파손·13만 인구도시 정전되기도

▲ ⓒ 익산시청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15초 간격으로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폭음과 진동은 13만 인구가 밀집된 이리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다이나마이트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 등 도합 30.28톤에 이르는 화약을 적재한 열차는 9일 밤, 인천역에서 광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10일 아침 9시 26분 다시 영등포를 출발, 이리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1분이었으며,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할 예정으로 사고 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고 있었다.

철도운송 제46조에 명시된 ‘화약품의 운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로 운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시발점인 인천에서 이리까지 오는데 26시간이 소요되었다.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씨는 화약류의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이 들었다.

양초로 인해 불이 붙은 침낭과 화약상자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15초 간격으로 세 차례의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켰다.그 시각에 월드컵 진출의 향방을 가리는 이란 전 축구중계가 한창이었고, 이리시민 500여 명은 삼남극장에서 공연중인 하춘화 쇼 관람을 하고 있었고, 밤늦도록 학교 교실에서는 입시를 앞두고 학생들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으로 총 1402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또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1㎞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너덜 너덜거리는 양상으로 소파를 면치 못했다. 반경 8㎞이내의 유리창은 온통 파손됐다.

이를 가옥동수로 보면 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에 그친 것이 6042동이었으며 공공시설물을 제외한 민간시설물 파손도 233건에 이르렀다. 이재민 수는 1674세대, 7873명에 달했다.

피해지역별로 볼 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이리역 부근의 창인동과 모현동 일대로 0.5㎢의 면적에 인구는 9106명으로, 주거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는 쑥대밭이 되었고 방향조차 분간키 어려울 지경이었으며 총 가구 1714가구의 43.4%인 744가구에 3385명이, 인구밀도가 낮은 모현동의 경우는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으며 총 가구 2216가구의 22.5%인 499가구에 2448명이 갈 곳이 없어졌다.

이 사고로 이리시내의 각급 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피해를 입었고 그 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심한 학교는 남성여자중·고등학교와 이리중·고교, 중앙초등학교와 송학초등학교였다.

남성여중은 건물지붕이 날아가고 유리창이 떨어져 나갔으며 입시를 앞두고 밤늦게 교실에 남아 친구들과 공부하던 졸업반 학생 송혜숙(17)양이 쏟아져 튀는 유리파편에 눈을 맞고 실명했다.

송학초등학교의 경우는 22개교 교실 중 10개 교실이 도괴 위험이 있어 마찬가지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특히 사고지점으로부터 300m지점에 있던 전북농아학교는 보청기 청능훈련기 등 특수교육기재가 모조리 부서지고 망가져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기도 했다.

이리시 교육청에서 자체적으로 설치된 재해대책본부의 집계에 의하면 각급 학교가 입은 피해는 1115교실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져 우그러졌고 선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총 연장 1650m가 파손됐다.

사고 폭풍으로 인해 고압선이 단절되어 11개소 29870m가 떨어져 나갔고 지역에 따라서는 1시간에서 13시간 동안 정전이 계속됐으며 창인동과 모현동 일대는 수도파이프가 땅이 뒤집히면서 터지고 휘어져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우물마저 모두 메워졌다. / 모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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