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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 실린 뉴사우스웨일즈 주 국회의사당 뒤뜰에 있는 '진실의 나무'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즈 주 국회의사당 뒤뜰에는 150살이나 된 '모튼 베이 무화과나무' 가 한 그루 있다. 시드니의 아열대성기후 영향으로 사철 푸른 나무다.

그 나무의 이름은 '진실의 나무(The Tree of Truth)'다.

'진실의 나무' 아래서

국회의사당 뒤뜰의 나무이름을 하필이면 왜 '진실의 나무'라고 지었을까. 보도에 의하면 이 이름은 정치인과 언론인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국회의사당 기자실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는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다.

"장관, 5분 후에 뒤뜰에 있는 나무 아래서 만납시다.(The Minister, out the back under the tree, in five minutes)"

호주는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장관직을 겸하고 있다. 거의 연중무휴로 열리는 국회에서 열띤 토론 끝에 결정된 정책들을 해당 장관이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게 관행이다.

바로 그 장관의 정책발표를 브리핑 룸이 아닌 '진실의 나무' 앞에서 하도록 기자들이 요청하는 것. 거기엔 "장관들이 진실만 말하게 하자"는 기자들의 숨은 뜻이 있다.

저녁시간에 'TV 이브닝 뉴스'를 시청하는 국민들은 의사당 건물을 배경으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정책을 발표하는 장관들의 모습에 아주 친숙하다.

그런데 최근 국회의사당에 인접한 도메인 공원의 늙은 나무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진실의 나무'도 함께 베일 위기에 처했다. 나뭇가지가 떨어지거나 나무 자체가 통째로 쓰러질 경우 행인들에게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진실의 나무'를 지켜낸 기자들

나무 지키기에 맨 먼저 나선 사람들은 녹색당원같은 환경보호주의자들이었다. 거기에 신문과 TV 기자들이 연일 그 나무의 벌목위기를 보도하면서 '진실의 나무'를 지키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마이클 리차드슨 자유당 환경문제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공공시설 관리예산을 대폭 삭감한 뉴사우스웨일즈 주 노동당 정부의 정책 때문에 애꿎은 나무들만 잘리게 됐다"며 "멜버른의 늙은 무화과나무들은 건강하게 회생시킨 바 있다"고 정부를 공박했다.

앤드류 우드하우스 문화유산 보존단체 회원은 "그 나무들은 시드니의 문화유산이다. 만약 벌목을 강행할 경우 국립식물공원의 정책을 재검토하도록 하겠다"며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 도메인 파크에 있는 '모튼 베이 휘그 트리'
한 시민은 의사당 앞에서 "이것은 현대판 '모튼 베이 대학살'이다"라고 외쳤다. 모튼 베이 대학살은 호주 개척시대에 브리스베인 근처의 모튼 베이에서 많은 죄수들이 중노동과 매질에 시달리다가 죽어간 사건을 말한다. 그 당시 '죄수 잔혹사'를 주도한 로건 대위는 죄수들에게 살해됐다. 모튼 베이 휘그 트리의 이름은 그곳의 지명에서 따왔다.

그러나 팀 엔트위스틀 국립식물공원 관리단장은 "연간 4백만명이나 되는 시민과 관광객이 찾아오는 공원에서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또 19세기 풍의 공원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며 늙은 나무들을 벌목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봅 카 뉴사우스웨일즈 주 총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문난 환경보호주의자인 봅 카 총리는 TV 인터뷰를 통해서 "양쪽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나무들은 벌목하고 '진실의 나무'만 보존하자"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결국 엔트위스틀 단장은 '진실의 나무'를 벌목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한 것. 다른 나무들은 15일 아침 이른 시간에 베어졌다. 벌목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시위를 했지만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호주 국회의원들 진실한가?

우연의 일치였을까? 나무를 보존하기로 결정한 날, 킴 예돈 퇴임 장관이 오스트리아 베니스로 관비 여행을 떠났다. 예돈 의원과 제니 가디너 국민당 의원은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등의 나라들을 18일 동안 여행할 계획이다.

여행목적은 각 나라의 공무원 부패방지 시스템을 시찰하기 위해서다. 예돈 의원은 최근까지 부패방지독립위원회(ICAC, 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의 의장직을 역임했다.

▲ 관비 여행을 비판한 4월 12일자 <데일리 텔리그라프> 사설
호주에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4월 12일자 '동료의 관비여행을 중지시켜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봅 카 정부의 결정을 비판했다.

"ICAC에서 물러난 국회의원이 하필이면 왜 여행하기 좋은 나라들만 골라서 가는지 모르겠다. 그만한 조사라면 통신이나 인터넷을 이용해도 충분하다."

예돈 의원과 가디어 의원의 여행경비로 책정된 예산은 6만 호주달러(약 4800만원)나 되는 큰 돈이다. 그들이 여행을 떠나기 1주일 전에 마이클 이간 뉴사우스웨일즈 주 재무장관은 "3억불 정도로 예상되는 적자예산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무원 3천명을 감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또 "각종 예산을 깎을 수밖에 없다"면서 서민들도 허리띠를 졸라매 달라고 당부했다.

TV도 킴 예돈 의원의 관비외유를 비난하는 방송을 길게 내보냈다. '투명한 정치'가 '진실의 나무'를 보존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데 퇴임장관을 배려하는 듯한 봅 카 뉴사우스웨일즈 주 정부의 결정은 정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뉴사우스웨일즈 의회의 몇몇 의원들은 다음달에 자매도시인 도쿄 행 관비외유를 계획했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취소한 바 있다. 부득이 긴축예산을 짜야하는 주 정부가 동료의원들의 선심성 관비여행이나 계획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 하다는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그 사안으로 인해 봅 카 뉴사우스웨일즈 총리는 '진실의 나무' 아래서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추궁받아야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약 4년 전, 320호주달러(약 25만원) 정도의 여행경비를 잘못 청구하여 집권당 코스텔로 재무장관에게 조롱에 가까운 공격을 받고, 상심한 끝에 자살을 기도한 연방의회 닉 쉐리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면 퇴보한 모습이다.

여의도에도 '진실의 나무' 한 그루 심었으면

▲ 4월 15일자 <시드니모닝해럴드>에 실린 한국 총선 관련 기사
한국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호주 언론이 대통령 탄핵 후에 치러지는 총선에 관심을 보이면서 연일 서울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총선 당일인 15일자 <시드니 모닝해럴드>는 '한국의 젊은층이 총선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제목의 특파원 기사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문제가 선거의 쟁점"이라고 보도했다.

반면 한국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4.15 총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진실 게임'보다는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퇴행적인 선거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그런 식의 정치에는 진실이 자리잡기 힘들고 자칫 국민의 정치적 불신만 키울 수 있다는 논평도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호주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 국민들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저급한 말을 듣고 싶으면 국회의사당으로 가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민생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시위도 한다. 특히 진실을 감추는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서 반드시 퇴출시킨다. 거기엔 언론의 끈질긴 추적보도가 한 몫 한다.

특히 돈과 관련된 추문이나 세금을 축내는 의원에겐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몇 년전 암으로 사망한 콜스톤 의원은 죽을 때까지 기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호주 기자들은 말한다.

"진실하지 못한 국회의원은 절대로 '진실의 나무' 아래에 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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