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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김동민 기자는 <작가 배수아의 정치 냉소주의 부추기기> 제하의 글에서 <조선일보> 3월 30일자에 실린 작가 배수아씨의 '정치 냉소자들 - "정치여, 나도 투표하고 싶다"를 비판했다. 이 글은 김동민 기자의 글에 대한 재반론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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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배수아의 정치 냉소주의 부추기기


미국 영화 <유브 갓 메일>은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 케슬린 켈리(멕 라이언 분)은 극장에서 남자친구 프랭크(그렉 키니어 분)에게 고백한다. ‘난 사실 지난 번 선거에서 투표도 안 했고, 그건 그때뿐이 아니었다.’ 남자는 기가 막혀 하다가 말한다. ‘용서해줄께.’ 케슬린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해서 극장에서 나가 버렸고 남자도 따라 나왔다.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직후에 카페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둘은 헤어진다.

김동민씨는 배수아씨에게 이렇게 묻는다. “투표가 가능하면 하는 게 좋은 그런 것인가?”라고. 이어서 “그러니 개 목욕시키는 일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로 비웃는다. 기가 막힐 일일 것이다. 투표일에는 투표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해야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상식이라는 이름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일정한 궤도로 살 것을 강조한다.

아마 김동민씨는 그렇게 충실히, 나름대로 소신과 열정, 원칙과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던 듯한데,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투표보다 ‘개 목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게 삶이라는 거다. 더군다나 ‘개 목욕’은 단순히 진짜 개를 목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그건 삶과 생활의 문제이기도 하다.

투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에 아주 많이 널려 있다. 어떤 이에게는 개 목욕이고 어떤 이에게는 애인과의 여행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밀린 빨래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개 목욕’은 삶에 대한 은유다.

김동민씨는 이어서 말한다.

“선거란 민주주의의 핵심적 제도이며, 투표는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가능하면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의무적으로 해야만 한다.”

선거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의제에서 핵심적인 제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역시 역사적인 공간에서 늘 변화를 겪는다. 어떤 선거는 바로 그 국민과 그 국민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집단, 당, 사회운동에 의해서 부정된다. 선거 보이콧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안 할 수 있다는 것.

김동민씨는 ‘가서 해라, 맘에 드는 사람이 있든 없든, 못생겼든 말든, 무조건 투표장에 가서 찍어라’라고 의무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도대체 포기할 수 없는 권리, 행사 안 할 수 있는 권리가 권리인가?

김동민씨의 글을 읽다 보면, 김동민씨가 <유브 갓 메일>의 ‘그 남자’로 느껴지는데, 영화 속 그 남자 주인공은 골수 민주당 지지자였다.

어쨌든. 사실 정치에 대한 냉소는 만성적이고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배수아씨가 설령 냉소주의를 부추긴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부추긴다 해서 더 부추겨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팽배해 있다. 이건 투표율과 무관하다. 투표를 하든, 안 하든 간에 그 냉소는 만성적이다. 물론, 이런 반박도 가능하겠다. 그럴수록 냉소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사회적 책무라고.

내가 보기에 김동민씨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낡고 고루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건 세계관의 내용에서라기보다는 태도에서 훨씬 잘 드러나는데, 난 그걸 임의적으로 ‘태도에 있어서의 보수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김동민씨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작가-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라는 것인데, 그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허무한 기초 위에 서 있는지를 새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김동민씨는 아직도 전통적인 지식인 상에 대한 보수적 집착을 하면서, 정치 특히 선거행위를 강조한다.

이의 이면에는 선거에 대한 지나친 물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선거행위는 정치의 매우 작은 부분의 하나며, 또한 그 ‘선택’이 아무리 잘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의 정치적 열망은 늘 왜곡되기 마련이다.

왜 왜곡되기 마련인가. 그것은 대의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로부터 노정된다. 시스템이나 테크니컬한 것들로 보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날이 정치적 냉소가 심화되고 있고, 배수아씨는 그것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디에? 언론에.

이는 김동민씨가 인정하고 수긍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한국 언론 역시 일정하게는 대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수아씨의 의견 같은 것이 선거에서는 ‘기권률’로 반영되듯이, 언론에는 그러한 의견이 일부 반영되는 것으로 대의된다. 수많은 유권자의 그러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김동민씨는 배수아씨가 ‘선거 때마다,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부추긴다’고 하지만, 사실 선거 시기에는 선거에 대한 냉소를 부추기는 기사가 5%라면, 선거에 대한 참여를 캠페인 하는 기사가 95%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배수아씨와 같은 의견이 오히려 드물다.

선거 참여 캠페인은 거의 선동에 가깝다. 중앙선관위가 참여를 독려해도, 수십 억의 광고로 종용해도, TV 뉴스는 선거일이 며칠 남았다고 연일 공지하고 주지시켜 주는데도 투표율은 늘 낮아져 왔다. 투표율이 낮아진 배경에는 이러한 ‘투표 참여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깔려 있는 기본적 냉소와 불신이 있다.

김동민씨 같은 방식의 사고의 근저에는 ‘기권은 적을 돕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고, 김동민씨의 경우에는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이러한 사고는 ‘투표 안하는 20대와 젊은애들이 문제야 문제’라는 방식의 사고와 잇닿아 있다.

누구를 적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김동민씨의 잣대도 문제거니와 - 왜냐하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설정하는 각자의 기준이 다른데, 김동민씨가 상정하고 있는 적은 매우 뚜렷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 20대가 문제라고 치더라도 그걸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학생운동이든, 일상에서의 비판적 의식의 함양이든, 혹은 생활 정치의 구현이든, 그 무엇이 됐든 간에 20대의 삶을 바꾸는 문제를 강조해야 되는 거지, 투표장에 가라!, 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 냉소주의를 조장한 건 배수아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 기성세대 그 자체, 삶 그 자체라는 점에서 김동민씨의 의견은 그 대상을 잘못 설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동민씨는 “배수아와 같은 사람들이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수고를 회피한 까닭에 16대 국회가 마지막까지 ‘대형사고’를 치게 된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16대 국회가 친 ‘대형사고’가 왜 배수아 혹은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인가? 16대 국회가 대형사고를 쳤다면 그건 16대 국회의 잘못일 뿐이다. 공연히 엉뚱한 사람을 잡을 필요가 없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그 눈과 에너지를 삶에 쏟을 필요가 있다. 세상을 바꾼다면 그건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배수아에게 결여되어 있는 지점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일 테고, 김동민도 황막한 논리로 투표에 올인하자고 하기보다는 그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참정권 확대의 역사는 결국 삶의 문제를 둘러싼 노동자, 여성, 소수 인종의 싸움과 투쟁이 한 발 한 발 내딛은 역사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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