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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과 구례 시가지. 새순이 돋은 산사의 꽃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사성암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과 구례 시가지. 새순이 돋은 산사의 꽃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 정상필
꽃샘추위가 지나간 구례는 완연한 봄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디를 가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사성암(四聖庵)’에 갈거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래….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그렇게 좋다드라”하고 말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어머니와의 산책은 이렇게 시작됐다.

생각해보니 어머니와 단 둘이 어딘가를 구경(?)하기 위해 길을 나선건 처음이었다. 참 너무도 무심했다. 사성암에서 사진을 찍어볼 요량으로 전날 어머니께 사진기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몇십 년 전 아버지가 쓰던 굉장한 골동품 사진기를 내놓으셨다. 그 사진기에 필름을 채워넣고 어머니와 사성암으로 향했다.

처음 만져보는 구식 수동 사진기였지만 아버지가 썼던 것이라 생각하니 어느 디지털카메라보다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에게 기본적인 사용법을 배워 찍어봤는데 자동과는 또 다른 손맛이 있었다. 사진을 찍기 전, 레버를 한 번 당겨야 하는 것도 잊어선 안 될 사항이었다.

사성암은 구례읍 죽마리 오산(鰲山)의 꼭대기에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사성암으로 가는 이정표가 생긴 걸 보고는 친구와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 다시 찾아보리라 다짐을 했다. 사성암을 알리는 이정표는 아마도 암자로 가는 찻길이 놓이면서 생긴 것이리라.

구례군청 앞에 있는 이정표(아래)와 찻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바라본 사성암. 꼭대기 암벽들 사이로 사성암이 보인다.
구례군청 앞에 있는 이정표(아래)와 찻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바라본 사성암. 꼭대기 암벽들 사이로 사성암이 보인다. ⓒ 정상필
등산로를 따라서 걸어갔더라면 좀 더 오랜 시간 어머니와 시간을 함께 했을 지 모른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눈 앞에 있는 신작로의 유혹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걸어간다고 했으면 어머니도 쉽게 따라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사성암으로 오르는 신작로는 그야말로 ‘긴장의 길’이었다. 집을 떠날 때는 봄햇살을 만끽하고 유유자적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암자에 도착하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꾸불꾸불한 길 때문이다. 암자 어느 처사의 말로는 주지스님이 사비를 들여 닦은 길이라 더 꾸불꾸불하고 좁단다.

좁은 길은 그렇다치더라도 가파른 경사는 핸들을 다시 한 번 꽉 움켜쥐게 만들었다. 한 번 다녀갔던 길이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겁이 유난히 많으신 어머니는 조수석에 앉아 창문 위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내 생각엔)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544년(성왕 22년) 연기조사가 세웠다는 사성암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리다가 ‘사성암사적(四聖庵史蹟)’에 4명의 고승(원효, 도선, 진각, 의상)이 수도했다고 해서 사성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당대의 대단한 지도자들이 구례처럼 조그만 시골 마을에 수도하러 왔다는 것이 신기하고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성암의 유래는 이렇다.

어머니는 십수 년 전에 등산로를 이용해 아버지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하셨다. 사성암의 신축 법당들을 보시고는 많이 달라졌다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셨고 나는 혼자서 사진을 찍거나 암자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여래입상(오른쪽)과 불상들이 여래전(왼쪽)에 모셔져 있다.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여래입상(오른쪽)과 불상들이 여래전(왼쪽)에 모셔져 있다. ⓒ 정상필
사성암에 도착하면 바로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래전. 이곳은 곡성 태안사에서 모셔온 불상들과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이 모셔진 곳이다. 웬지 ‘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냥 믿기로 했다. 손톱으로 바위에 불화를 그리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손톱이 남아나지 않았을텐데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여래전을 나와 산신각으로 가는 길에 위태롭게 솟아 있는 좌선대에 올랐을 때는 어쩌면 정말로 원효스님이 오랜 시간 이 곳에 머무르며 수도를 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보이는 구례 시가지와 지리산, 섬진강의 모습은 가히 속세를 잊고 수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충분히 해냈을 법 했다.

어머니는 그새 힘에 부치는 듯 그늘에서 쉬고 계셨다. 어머니가 차에서 쉴 수 있도록 차문을 열어드리고 다시 사진기를 잡았다. 낡고 조금은 지저분한 사진기라 처음엔 작동이 될까하는 의심했지만 작동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떠나 찍을 때마다 들리는 원시적인 ‘찰칵’ 소리에 나는 매료되고 있었다. 어느새 필름 두 통을 찍었다.

좌선대에서 내려오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작은 대웅전이 있고 그 뒤로는 산신각이라는 법당이 있다. 이곳의 모든 법당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들이 너무 새 것이라 그윽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들이 충분히 이를 만회해 주었다.

아래 보이는 꼬불꼬불한 길이 찻길이다. 저렇게 3km 정도를 올라오면 사성암이 있다.
아래 보이는 꼬불꼬불한 길이 찻길이다. 저렇게 3km 정도를 올라오면 사성암이 있다. ⓒ 정상필
이 곳은 그야말로 ‘도’를 닦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사성암으로 가는 찻길이 생긴 후로는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졌다고 한다. 암자 곳곳에 놓인 기와불사들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조용한 시골의 암자로 남느냐, 유명한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느냐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지만 수많은 기와들은 어쩐지 사성암이 관광지가 돼가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 또한 수혜자이지만 어째 썩 기분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좋은 곳을 남에게 알리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곧 길이 넓어지고 버스가 다닐 것이라는 처사의 말에 오산과 사성암이 겪게 될 시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성암이 전라남도가 지정한 3대 아름다운 사찰에 선정돼 도차원에서 도로 확장을 추진한다고 하니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사성암 아래 주차장과 기념품 가게가 들어선다면 지금 느끼는 이런 한가함도 위협받을 거란 생각에 씁쓸했다.

방문객들의 이름이 적힌 기와들. 암자 경내 곳곳에 이런 기와들이 빼곡하다.
방문객들의 이름이 적힌 기와들. 암자 경내 곳곳에 이런 기와들이 빼곡하다. ⓒ 정상필
친절하게 절을 안내해준 처사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라타니 정체모를 냄새가 났다. 혹시 어머니가 방귀를? 다행히도 어머니는 삶은 계란을 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랑 같이 소풍(?)을 간다는 설렘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암자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를 팽개치듯 두고 내 할 일만 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그런 미안함을 만회하는 건 어머니가 준비하신 간식을 맛있게 먹는 일밖에 없다. 우유와 삶은 계란을 어머니와 사이좋게 먹고 시동을 걸었다. 부모님과 집을 떠나 산 지가 십수 년이 됐다는 것은 내 나이도 적은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구례에 올 때마다 나는 부모님에게 받기만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계란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반기는 부모님이기에 고마움을 잊고 살았다. 계획에 없던 어머니와의 산책이 애초 그냥 바람쐬러 가려던 나의 마음을 조금 무겁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성암이 개발될 거라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과 함께.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산사의 봄날은 그렇게 화창했지만 내려오는 길은 잡념으로 인해 그리 경쾌할 수 없었다. 다음엔 어머니를 모시고 걸어서 사성암에 올라 보리라 다짐을 하면서 내려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돼지갈비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별거 아닌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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