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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아에타 원주민들의 집 모습
전형적인 아에타 원주민들의 집 모습 ⓒ 이경수
화장실과 전기, 전화, 컴퓨터는 물론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문명인은 별로 많지 않다. 시간 약속을 할 때 해뜨기 전과 해가 떠서 머리 위에 있을 때까지 혹은 해가 서산머리에 내려 앉기 전에 만나자고 하면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도대체 어느 시대 이야기야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명 너머의 세계는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를 경험한 순박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는 이전의 그들의 생활 모습대로 살 수 없다. 그만큼 문명의 힘은 엄청나다.

물물 교환과 수렵, 채집을 주 생활 방식으로 삼았던 필리핀의 아에타 원주민들의 삶은 1991년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화산 폭발 이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게 그리고 급속히 변화했다. 그들은 40~100여 가구가 독립된 친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 왔다. 하지만 금세기 최대 화산 폭발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일어난 후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필리핀 정부와 국제기구에서 마련해 준 재정착 촌에서(총 24곳, 1곳당 약 500~1000가구로 구성) 다른 종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따갈록 종족과 일루까노 종족은 이미 문명인들이며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비해 아에타 종족은 산악 지역에서 오랜 은둔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나 농사 지을 땅을 잃어버린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화산재로 덮여버린 산과 들에는 생계 수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문명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생활 양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갈기 시작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준 외지인들과 더불어 플랜테이션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부분의 소출을 외지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원주민 마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와 농구대
원주민 마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와 농구대 ⓒ 이경수
처음 유치원을 설립하고 무료로 문맹퇴치 교육 사업을 할 때는 대부분의 원주민 학부모들이 일손 부족을 이유로 7살 미만의 유아들을 노동 현장(구걸이나 채집)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글을 알아야 타 종족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들의 마을에 문맹퇴치 센터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 후 자신들만의 농토를 갖게 되면서 원주민 마을에서는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거주하는 최소한의 공간 이외에는 모두 공유지로 여겼었는데, 농토 개념이 생기면서 각자 집의 경계에 말뚝을 박고 전선과 철책으로 개인 소유를 표시하는 사유화가 시작된 것이다.

다툼의 분쟁은 마을 촌장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고 아름다운 공동체에는 최초의 정치적 정쟁이 생기기도 했다. 정쟁의 원인은 일루까노 종족이 사는 호수 건너편의 마을이 바랑가이(면 단위의 최소 행정 단위) 소재지 역할을 하면서 원주민 마을들이 아에타 종족만의 독자적인 바랑가이를 형성하고자 시도한 것에서 시작됐다. 이를 위해 시쵸(바랑가이의 하위 행정 단위) 촌장들이 힘을 합치자 바랑가이 촌장이 그 중 가장 리더십이 강한 시쵸 촌장을 임의로 해임하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기에 이르렀다.

바랑가이 소재지에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고 2003년부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최소한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 환경과 대중 교통 수단이 하루에 2회 이상 상설 시장이 있는 군 소재지까지 운행한다. 한 호수를 건너 원주민 마을까지는 약 1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 외의 다른 마을들은 산을 넘어 약 2시간에서 6시간까지 소요되기 때문에 자치권을 얻기 위해 문명인들과 싸우는 아에타 원주민들은 힘에 겨울 수밖에 없다.

필리핀 사람들의 대중교통 수단인 찌프니
필리핀 사람들의 대중교통 수단인 찌프니 ⓒ 이경수
바랑가이와 바랑가이 간에는 워키토키로 의사소통을 하고 시청과는 군용 무전기로 행정보고가 이루어지는데 반해 원주민 상호 간의 의사소통은 걸어서 산을 넘고 배를 타고 물을 건너 하루 길을 가야만 하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결국 원주민들만의 행정 자치권은 찾지 못했다.

한국도 방문했던 한 원주민 지도자는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몰랐을 때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가난해서 하루에 한끼만 먹었어도 서로 서로 나누어 주곤 했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다니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부족이 우리 아에타 종족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문명화 되고 먹을 걱정 없는 우리는 원시 생활을 하는 세계의 각 부족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일까 자문해 본다.

마빠나오 유치원 원생들 모습
마빠나오 유치원 원생들 모습 ⓒ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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