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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7일 출간된 에바 졸리의 책 표지
2003년 7월 7일 출간된 에바 졸리의 책 표지
에바 졸리는 2001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럽판에서 '올해의 유럽인'에 선정되었으며 2001년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올해의 청렴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스칸디나비아 항공 기내잡지 <스카노라마>에서 '올해의 스칸디나비아인'으로 선정되는 등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엘프사 사건을 수사하는 8년여 동안 매일 같이 24시간 경찰의 경호를 받아야 했다.

누군가가 에바 졸리를 추적하여 기회만 닿는다면 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에바는 콜롬비아 마약왕이나 마피아 집단을 수사한 것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문명 국가에 속하는 프랑스의 정치인, 법조인, 회사 임원 등의 부패를 수사했다.

통상 부패란 돈과 권력을 주무르는 엘리트 계급이 저지르는 범죄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는 간헐적으로 고위 엘리트 계급이 저지른 커다란 부패 사건들이 터지곤 했다. 부패 혐의가 있었던 인물은 자크 시락, 알랭 쥐뻬, 롤랑 뒤마, 이들 모두의 대부격인 프랑소와 미테랑 전 대통령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 학교 출신이며 공통된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자인 피에르 라스꿈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자신이 법 위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재판을 받았지만 감옥형에까지 처해지진 않았으며, 부패 혐의로 실제로 감옥에 갇힌 베나르 따삐, 르와 르 플로쉬-쁘리장, 알프레드 지르방 등과 같은 인사들은 장관이나 회사 임원이긴 했어도 배타적인 엘리트 특권 계급에 속해 있진 않다.

그리고 부패를 밝혀내고 도려내기 위해 싸웠던 인사들도 통상 엘리트 계급 바깥에 있는 인사들이며, 에바 졸리 역시 프랑스 부패와 벌인 싸움에 있어서 전형적인 외부 인사에 속해 있다. 그럼 이 에바 졸리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노르웨이 노동 계급 출신

에바 졸리는 1981년 판사가 될 때까지 무명 인사에 불과했다. 그해 프랑스 법무부는 법조인 중 판사를 발탁하기 위한 특별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에바는 이 관문을 통과하고 처음에는 검사(기소 담당자)보를 맡았으며, 1993년 프랑스 전역에서 562명이 정원인 수사판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수사판사란 사실상 우리 나라 검사에 해당한다. 즉 수사판사란 광범위한 수사권을 가지고 있어서 프랑스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손에 쥐고 있는 검사이자 판사로서 원칙적으로 해임도 되지 않는 직책이다.

프랑스 언론은 에바 졸리를 '소방헬기' 혹은 '북쪽에서 온 불도저'라고 불렀다. 정치 부패 근절에 초지일관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바가 고위직 부패에 전념하다 보니 <파리 매치>라는 잡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통령 후보로까지 뽑히는 명성을 누렸다.

실제 에바는 불도저처럼 생기진 않았으며,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 출신으로서 얼굴이 둥글며 수줍은 미소를 띠고 곱슬 금발머리에다 북극의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동계급 출신인 그로 에바 파세스는 1964년 겨울 여러 소녀들과 함께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슬로에서 파리행 열차를 탔다.

이때 20세의 홀쭉한 에바는 다른 친구들처럼 노닥거리거나 수다를 떨지 않고 열심히 프랑스어 동사를 공부했으며 다음날 입학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에바는 파리에서 졸리라는 집안에 입주하여 집안 일을 거들어주며 프랑스어를 배우는 오페어였다.

에바가 일하던 이 졸리라는 집안은 파리 룩상부르 가든 지역 인근의 단독 주택가에 사는 프랑스 부르주아지 계급 상류층에 속했다. 그런데 당시 에바는 주인 아들과 사랑에 빠지고 마는 고전적인 실수를 범한다.

프랑스의 인종 혹은 국적 차별

그때 에바의 고용주인 졸리라는 의사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써보낸다. "넌 에바와 결혼해선 안 된다. 에바는 부자도 아니고 앞으로도 부자가 될 것 같지 않단다. 우리는 에바의 가문이 어떤지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에바는 용모가 세련되지 못하고 얼마나 거친지 제발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 졸리 가문은 모두가 멋진 용모를 하고 있지 않느냐?"

에바가 결혼할 때 남편은 가족으로부터 재산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에바 졸리가 프랑스로 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가족들은 외국인인 에바 졸리가 프랑스 공직자를 수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기까지 했다. 에바의 이름 중에 들어 있는 '그로'라는 말은 발음상 불어의 '뚱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버지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스칼 졸리와 에바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으며 파리의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이름도 그로 에바 파세스에서 에바 졸리로 바뀌었다.

에바는 의대를 다니던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다른 한편으로 비서로 취직하여 일했다. 에바는 노르웨이 악센트를 미묘한 프랑스어 발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어학 코스도 계속 다니는 동시에 야간과정 법학코스도 함께 다녔다.

이렇게 에바는 무척 힘든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바는 16세 때부터 이미 식당 서빙, 영화관에서 초콜렛 팔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다해본 덕분에 이런 일들도 곧잘 해냈다. 에바는 직장 일, 공부, 가사 노동 등 1인 3역을 잘 조화시켜 갔으며, 파리에서 딸을 낳고 남편이 개업한 시골 도시에서는 아들을 낳아 길렀다.

에바 졸리는 법학 학사를 받게 되자 병원 정신과에서 법무 카운슬러로 일했으며, 37세 때 마침내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국립사법관(치안판사)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이후 8년 동안 오를레앙과 파리 교외 지역인 에브리에서 지역 치안판사로 봉직하게 된 에바는 매맞는 아내, 학대당하는 어린이, 무장 강도, 사기, 강간, 살인 등 인생의 온갖 어두운 면들을 접하게 되었다.

1989년 에바는 법률전문가를 뽑는 재무부 공채에 지원하여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서 에바 졸리의 소속기관은 '범부처산업부흥위원회'이었다. 이 부서는 위기에 처한 각종 산업분야에 대해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일을 담당했다.

여기서 에바는 세느강을 내려다보는 최첨단 사무실에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기업과 회계분야 세계를 탐사하게 된다. 당시 에바의 임기는 1993년까지였으며 1993년 차장으로 승진한다. 이렇게 해서 에바는 치안판사로서 그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여성으로서도 최초였다. 물론 오페어 출신으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더더욱 최초였다. 에바는 50세가 되어 파리 회계사기 수사파트 즉 회계법원에 입성했다. 당시 치안판사 중 회계분야 사기죄 수사파트를 지원한 치안판사는 거의 없었다.

전무하다시피 했던 고위공직자 부패 수사

에바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쓴다. "당시 회계법원장은 나에게 '영구미제사건으로 되어있다시피 한 이토록 엄청난 사건들, 난 뭐가 뭔지 전혀 이해 못해요. 당신이 이곳 회계분야 사기죄 수사파트를 택한 건 노르웨이인이며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이후 9년 동안 에바는 프랑스 언론 톱기사가 장식하듯이 프랑스에서 가장 공포에 가까운 여성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정점은 1996년 에바가 기업인과 정치인 다수를 감옥에 가두도록 지시했을 때였다. 당시 프랑스 정치엘리트들은 언제 에바에게 소환 당할 지 모른다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에바가 당시 회계법원에 막 부임했을 때 업무환경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둡고 비좁은 방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낡은 전화기 한 대, 타자기 하나, 금속 캐비넷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서류 뭉치 등이 전부로서 일할 수 있는 조건조차 갖추지 못했다.

구둣가게만 해도 이보다 장비가 더 나을 것이라고 보았다. 에바는 자기 딸이 쓰던 낡은 컴퓨터를 빌리며 자기 돈으로 팩스기를 사들이고 전화 시스템을 고쳐 자기 일을 하면서도 직원을 부를 수 있도록 손을 보았다.

상급자인 법무부장관 엘리자베스 기구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에바는 극도로 악조건인 당시 사무실 업무 환경 모습을 TV 직원에게 찍어두도록 했으며 1년 후 기자회견에서 이를 보여주며 업무환경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구 장관은 불쾌했지만 덕분에 에바는 '파리 오페라좌' 부근의 시설이 아주 좋은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일을 시작한 에바는 자신이 일을 헌신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동료들이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도대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에바는 2000년 낸 자서전 <이 일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에서 "일에 흥미를 가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파리 법원장조차 나에게 자신은 '어디에도 없는 이토록 엄청난 파일들을 전혀 알아볼 수조차 없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소'라고 말했다"라고 쓰고 있다.

에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에바는 엄청난 서류더미를 정밀 탐색했으며 곧 공적 자금이 조직으로 빼돌려진 것을 밝혀내게 된다. "당초 나는 부패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몰랐다. 사람들이 모두 법을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픽션을 훨씬 뛰어넘었다. 부패는 고질병과도 같았다. 고위직의 사기범죄는 거대한 대양과도 같다. 나는 매일같이 새로운 범죄를 밝혀냈다."

에바가 파리 법원청사에 오기 전까지는 어떤 수사판사들도 굵직한 회계범죄 수사를 제대로 벌여 법원 판결까지 받아내 본 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에바는 지금도 회계 부패범죄의 95%는 법망을 피해가고 있다고 밝힌다(계속). (한국자치경찰연구소 소장, 정치학박사)

덧붙이는 글 | 12일 한국부패학회 국제학술회의 발표내용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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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호 기자는 성균관대 정치학박사로서, 전국대학강사노조 사무처장, 국회 경찰정책 보좌관, 한국경찰발전연구학회 초대회장, 런던정치경제대학 법학과 연구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경찰정치학>, <경찰도 파업할 수 있다>, <경찰대학 무엇이 문제인가?>, <삼과 사람> 상하권, <옴부즈맨과 인권> 상하권 등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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