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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방과 운동화는 없다. 대신 새 책보와 까만 고무신, 설에 사주신 새 옷으로 멋을 한껏 부리고 신작로를 따라 걷는다. 필통 속엔 연필 세자루, 칼, 지우개가 들어있고 뿔 책받침이 보자기에 싸여 손에 들려 있다.

학교 근처 담장을 지나 점방에 들러 '쫀드기' 하나씩 사서 입 안에 넣고 들어선 1975년 3월 2일 백아산 아래 북면동국민학교 교정은 드넓었다.

"아가, 선상님 말씀 잘 들어야 헌다. 돌아 댕기지 말고…. 알았제?"
"잉"
"참말로 약조허자."
"알았어라우."

콧물 질질 흐르는 네 마을 촌뜨기 48명은 엄마 손 잡고 입학식을 치르러 학교 첫 나들이를 나섰다. '빠끔살이(소꿉장난)'와 멱감기,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던 아이들이 교육 현장, 사회에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부모님들 마음도 들떴다. 자신이 못 배워 까막눈이지만 자식이 대신 배워 한과 설움을 풀어주고 가난을 물리고 집안을 일으켜주리라 잔뜩 기대를 했으니 오늘은 어른들에겐 꿈만 같은 날이다.

엄마와 했던 약속은 잊은지 오래다. 소란은 끓이질 않았다. 동네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새로운 모든 것을 만져보고 타보고 돌려본다. 마냥 신기해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그네, 회전 그네, 철봉, 미끄럼틀, 쇠사다리, 시소 등 놀이 기구도 이젠 코흘리개 입학생들 차지다. 옆 마을 아이들을 보곤 주먹다짐도 한다.

입학식이라고 학부모까지 죄다 몰려온지라 드넓던 운동장은 꽉 차 있다. 호루라기 소리와 모이라는 방송이 나온 후에야 간신히 소동이 멈췄다. 6학년에서 2학년까지는 선생님의 통솔에 따라 가지런히 줄지어 섰지만 학교에 처음 온 신입생은 줄도 삐뚤삐뚤하고 엄마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꽁꽁 얼었던 운동장에 사람들이 몰려 한 곳에 오랫동안 밟고 서 있자 신발 자국을 따라 땅이 녹아 질컥질컥했다. 얇은 고무신으로 전해지는 찬 기운에 발이 아려 온다. 그걸 피하기 위해 발을 자꾸 옆으로 움직여 보지만 도리가 없다.

아이들 왼쪽 가슴마다 하얀 손수건이 곱게 접혀 길쭉하게 옷 핀으로 찔러 걸려 있고 다른 쪽 가슴엔 까만 이름표에 '김규환' '오병석' '정육남' '김상복' '성치곤' '김홍섭' '마영희' '김일순' '김삼순'이라고 선명히 적혀 있다.

"전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 "이상으로 입학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입학식이 끝나자 각 학년은 교실로 들어간다. 누런 코 질질 흘리던 우리 1학년 한 반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 때문에 엄마들이 손을 잡고 교실 문 앞까지 따라왔다.

"핵교 마치면 뽀로(곧바로) 집으로 오니라와~"
"싫어. 엄니랑 시방 한꾼에(한꺼번에) 갈 것이랑께. 엉엉엉"
"거식아 글면 안돼, 오날부텀 선상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쓰제. 알겄냐?"
"싫단 말야. 엄마 가면 안돼."
"동무들이랑 재밌게 놀다와."
"거시기 엄니 얼렁 갑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다. 어머니들은 달음질쳐 학교를 떠났다. 교실로 간신히 아이들을 인솔해 들어가는 선생님은 당분간 힘든 기간이 몇 날 며칠이고 이어질지 모른다.

교실에 들어간 아이들은 책걸상을 들었다 놨다 뒤집고 밀고 다닌다. 교실은 난장판 그 자체다. 걸어둔 그림도 떼어 두들겨 보는 아이들. 장작 난로 뚜껑으로 다른 아이 머리를 쳐대는 아이. 언제 액자 유리와 유리창을 깨트릴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장난이 이어진다.

"자, 자…. 정리하고 다들 앉아요."
"어허, 조용히 합시다."
"키 순서로 서 보세요."

이런 상황을 처음 접한 아이들은 별 응답이 없다. 그래서 1학년 선생님은 늘 곤경에 빠지곤 했다.

"얌마!"
"왜 그려 이 씨불놈아."
"선상님, 요새끼가 자꾸 때릴라그요."
"어허 동무들이랑 사이 좋게 지내야지…."

방법은 딱 한가지다. 아이들과 친해져야 어찌어찌 해 볼 도리가 있으니 호통칠 일도 아니었다. 선생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고 또박또박 자상하게 말씀을 하셨다.

"거기 키 제일 큰 아이, 오늘 급장해라."
"선상님, 급장이 뭐시다요?"
"우리 어린이들 대표지."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선생님은 아이들을 불러모으고 소개를 했다.

"나는 이평로라고 해요."

분필을 들어서 칠판에 "이평로" 라고 썼다. 하지만 유치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2/3 이상은 무슨 글자인지 몰랐다. 한글도 떼지 못한 아이들과의 첫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자, 그럼 우리 노래 하나 해볼까?"
"예!"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자, 따라 해보세요."

"학교 종이 땡땡땡"
"핵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선상님이 우리럴"

"기다리신다."
"기다리신당께."

"잘 했어요. 그럼 우리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해볼까?"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풍금 치시는 선생님은 마술사다. 다시 노래가 이어지는 사이 마을별로 늘어선 아이들은 노래엔 별 관심이 없고 손으로 다른 마을 아이들을 콕콕 찔러대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풍금만 쳐다보시는 선생님은 아이들끼리 무슨 아귀 다툼을 벌이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요 새끼덜!"
"니기덜 뒤질래(죽을래)?"

강례 마을과 우리 마을 아이들이 서로 엉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댄다. 평지와 송단 다른 두 마을은 숫자가 딸리는지라 상대도 안 된다. 우리 마을은 남자 아이 숫자도 제일 많거니와 열살 아홉살짜리가 더 많았다. 육남이 병주, 성호는 키도 제일 커서 상복이 혼자 버티고 있는 강례 마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앞 줄 아이들이 가린 뒤로 예닐곱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상복이 머리를 쥐어박고 한 대씩 갈긴다.

"개새끼, 또 덤비면 뒤질 줄 알아."
"씨…."

그 단 한판으로 교실은 우리 양지 마을 차지가 되었다. 싱거운 싸움이었다.

"선상님 노래 하나 더 해주싯쇼."
"뭐할까요?"
"암시랑토 않은 게 아무거나 해주세요."
"그래."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점심녘이 지나자 선생님께서는 국어 수업을 시작했다. 맨 첫 쪽을 펴자 무궁화가 그려져 있고 태극기를 넘기자 첫 글자는 '나'로 시작한다. 다음 줄부터 한자씩 이어진다.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펼쳐진다. 그날로 첫 장을 배우고 다음날부터는

'가자 기영아 순희야'

'이기영!'
'예.'
'김순희!'
'예.'

다음날 오전 운동장에 다시 모인 아이들은 체육 수업을 했다.

"앞으로 나란히!"
"바로!"
"열중 쉬어!"
"차렷!"
"경례!"

이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어 "앞으로 갓!" "하나 둘" 소리에 맞춰 "셋 넷"을 외치다가 "제자리 섯!" 구령에 맞춰 "하낫 둘!"을 연습한다.

코흘리개 병석이는 선생님께서 제자리걸음을 시키는 데 괴상한 몸짓으로 친구들을 무척 웃게 만들었다. 통상 왼발에 맞춰 번갈아 가며 팔이 교차되어 걷는 걸음과 달리 그 아이는 두 발은 한걸음씩 디디지만 손은 동시에 두개가 함께 내려오고 올라가는 걸 연속으로 반복했다.

그 어색했던 동작을 다시 설명하면 발이 차례대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건 정상인데 팔은 발과는 전혀 상관없이 같이 오르고 같이 내리기를 반복한 것이니 "청기 내려 백기 올려" 놀이처럼 둘 다 뻣뻣하게 어깨까지 오르고 반대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며칠간의 어색한 만남이 이어졌고 차차 익숙해질 즈음 재미난 사건이 줄을 이었다. 어떤 친구는 점심 먹으러 집엘 갔다가 학교에 오지 않거나 2교시가 끝나면 학교 화장실이 너무 깊다며 배를 잡고 집으로 달려가다 끙아(대변)를 보는 수도 있었다.

뿐이던가. 토요일은 급식 빵을 안 준다며 아예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도 더러 있었다. 수업 끝나는 종이 조금이라도 늦게 울리면 소변이나 대변을 옷 입은 채로 보는 바람에 교실 안은 온통 냄새에 찌들어 있기도 했다.

그런 만남은 6년 아니 9년 동안 이어졌으니 나중엔 친구 누구네 집에 숟가락 숫자도 파악되고 호구 조사도 따로 할 일이 없도록 친해졌다. 그런 시골 꿈나무들이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으니 추억은 세월의 흐름에 하나씩 묻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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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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