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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먼 북소리>
ⓒ 문학사상사
이 책은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로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두 작품을 쓰던 시기에 함께 썼던 에세이집이다. 이 에세이는 일본에서 이미 출간되었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지 않았다가 2004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새롭게 선보였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의 소설과는 별개로 하루키가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들이 자주 하는 얘기는, 그의 소설과는 다르게 수필은 하루키만의 독특한 개성적 문체가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감각이 그대로 살아있는 이 책 또한 그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3년간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겪게 된 온갖 에피소드가 재미있게 나열되어 있고, 사색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 또한 빠짐없이 등장한다.

가벼움 속에 진지함을, 일상 속에 삶의 철학을, 사소함 속에 문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마치 잘 섞인 샐러드를 먹는 듯한 상쾌함을 던져 준다. 두꺼운 책의 무게에 부담을 느끼던 독자일지라도 어느덧 그의 글 솜씨에 푹 빠져 킥킥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책이라고 할까.

“저녁식사를 끝내면 밖은 이미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다. 나는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아내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쓰고 또는 가계부를 정리하거나, ‘아아, 나이 좀 안 먹을 수 없을까’라는 등 영문을 알 수 없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추운 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핀다. 난롯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나간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마감 날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서 타닥타닥하고 불꽃이 튈 뿐이다. 기분 좋은 침묵이 사방에 가득하다.”


이 같은 기분 좋음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강박적인 일본 생활에 염증을 느낀 하루키는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소설 작업에 열중한다.

“그리스의 섬은 대부분 영화 <세브린느>에서의 카트린느 드뇌브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부활절부터 10월 중순에 걸친 여름 휴가 시즌 중의 외국인 관광객에게 보이는 대외적인 얼굴이고, 또 하나는 그 나머지 기간, 즉 비수기에 자신들만 있을 때의 진짜 얼굴이다.

이 두 얼굴은 극과 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저하게 다르다. 너무나 달라서, 어느 쪽이든 한쪽만 본 사람이 나머지 한쪽의 얼굴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루키가 머무른 그리스는 이 두 가지 얼굴 중 비수기의 얼굴이다. 그래서인지 북적북적한 관광지로써의 그리스보다 차분하고 시골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리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의 자그마한 섬들에 머무르면서 그리스 서민들의 삶을 맛보고 그를 통해 <상실의 시대>와 같은 창의적인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에 머무른 그의 삶은 온갖 재미와 사건들로 가득하다.

로마에서 마주치게 되는 흔한 좀도둑들과 주차 전쟁, 엉터리 우편 제도 등 그의 이탈리아 생활은 정돈된 도쿄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탈리아 체류 기간 동안 이탈리아 사람들의 선천적 낙천성을 경험하고 그들의 재치와 발랄함을 느끼면서 문화의 차이를 생각하는 소설가.

“세상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 실제적인 철학이 있다. 거리에 서서 보고 있으면 뭔가 배우는 것이 있다. 도쿄에서는 길에 서서 가만히 뭔가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 로마에서는 그런 걱정은 없다.

모두 곧잘 멈춰 서서 뭔가를 지그시 바라본다. 아내가 막스 마라며 폴리니 상점의 윈도우 안에 있는 물건을 몹시 갖고 싶은 눈초리로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길에 서서 거지의 모습을 관찰한다. 사람에게는 각각 인생의 방향성이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이와 같은 세밀한 관찰력과 사소한 것에서 얻어진 작은 삶의 의미를 위트 있는 문체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자동차를 보면서 일본의 자동차는 표정이 없지만 이탈리아의 자동차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고 발견하는 기쁨.

다른 이의 자동차 범퍼쯤이야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태도는 일본 사람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편물이 10년이 넘어 도착하든 말든 우편 공무원들은 느긋하기만 하고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구입한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고장이 난다.

하지만 자신의 만든 포도주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장인 정신,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재빠르게 대처하는 국민성 등은 이탈리아를 유지해 나가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 나라에는 적당주의자도 많지만 일부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고 빈틈없이 일 한다’고 평가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3년이나 다른 나라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문화에 젖어들어 소설과 번역 등의 글쓰기에만 전념하는 하루키의 삶이 부럽다는 점이다. 진정한 소설가를 꿈꾸는 자라면 이와 같은 외도 또한 자신의 성숙된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지 못하는 일상의 우리들은 재치 넘치는 하루키의 문체 너머로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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