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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당원으로서 가지는 권리의 정점인 비례대표 선출 선거권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행사하는 국민투표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선택'이 고르는 게 아니고 나머지를 버리는 것이라면, 그 동안 나의 수많은 선택의 과정엔 고민 없는 많은 버림이 있었다. 독재정권에 아부하고 부정으로 축재한 사람 등등 '쉽게 버릴' 것이 많은 만큼 비교적 쉬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르다. 얘기인즉, 버릴 것이 없다는 데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누굴 뽑아야 하나?'

장고에 들어간다. 행복한 고민 아니겠냐고 회사 동료들이 부러워하지만 버릴 것이 없는 나에게 그 선택은 잔인하다. 그 동안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기꺼이 희생한 그 많은 후보들은 전부 다 (나쁜 말로) "도토리 키 재기"이기 때문이다. 내세울 공약들도 크게 다를 성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안테나와 현미경을 동원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같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적어도 내 가치체계에 반하는 '배신'의 쓴맛은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고, 몇백억원이 있는데 몇십억원이 뭐가 문제라며 강변하는 그 많은 '386'들의 추악함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특히 박종철을 생각하면 열불이 솟는다. 그가 죽으면서 까지도 지키려 했던 그 선배가, 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데 공로를 세우던 그 검사가 바로 박종철을 죽인 집단과 궤적을 같이 한 당에 몸담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그들의 경력에는 '박종철'이라는 석자가 화려하게 들어가 있다)을 그들은 되풀이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

그래, 그것은 바꿔 말하면 믿음이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심 없이, 또 원칙에 휘둘림 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일단 국가 운영의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다보면 종합적인 상황과 거시적인 앞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무장하고 주뼛주뼛 찬성표를 그들은 던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보다 더 혹독한 상황을 극복한 객관적인 경험이 그 믿음을 공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두 21명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을 하였다. 면면이 권력이라는 유혹의 열매를 뿌리친 인생역정을 밟은 사람들이다. 3월 5일부터 14일까지 그들은 저마다 "나를 뽑아 달라"고 합법적인 공간 위에서 나를 포함한 5만 당원들에게 호소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알고 나도 알고 5만명의 유권자가 다 안다. 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친하니까, 같은 고향이니까, 같은 학교, 같은 사업장이니까 뽑아 달라는 천박한 한국 선거운동 방식으론 되레 낙선의 지름길이라는 걸.

그럼 그들이 유권자를 현혹할 상품이 무엇인가? 기존 선거판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예상하기 힘들다. 해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그 판이 자못 기대가 큰 것은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나는 또 나름대로의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도토리이지만 그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검증해야 한다.

피선거권과 선거권이 있는 민주노동당원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진성당원으로서 하나하나 그 선택이 크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유쾌한 마음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태세가 되어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리고 축제마당이다. 장미의 축제보다 더 화려한 이 축제에 나는 당당히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 것에 대해 밖으로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한 동안 이 꽃내음에 취해 나는 비틀거릴 게 뻔하다. 실컷 만끽하리라.

(그런데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내가 행사할 4표 중 하나-남녀 불문하고-는 농민 출신 후보로 꽂힌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시골 출신의 정서가 바탕이 되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피해자이고 이번 한-칠레 FTA에서 볼 수 있듯이 전면 몰살의 위기로부터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들을 대변해 줄 농민후보 단 한 명의 국회의원이 있었더라면…"라는 여의도 농민의 탄식이 가슴을 적신다.)

요즘 섬진강가에 매화 냄새가 그윽하다고 한다. 때묻지 않은 그 곳에 미리 가서 취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관광객일 뿐, 말할 것도 없이 그 곳의 주인들은 이제는 제법 고사리 손이 여물었을 김용택 시인의 제자들, 그 부모 형제들이다. 그 땅에, 그 강에 삶을 뿌리 박은 그들이 주인이다.

그리고 한 달 정도 뒤에는 여의도에도 '사쿠라'가 만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섬진강가와는 다르게 4년마다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는 이상한 땅이다. 그러면 그곳의 주인은 누구인가. 불행하게도 선거철만 되면 허리디스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노동자와 서민, 농민 등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을 항상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답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행복하게도 나는 이 답에 적합한 사람들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것도 자그마치 21명 중 골라야 하니… 분명 신선한 기쁨인 건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명단(가나다 순)

◆ 일반명부 : 강기갑(52. 전농 부의장), 김병일(48. 민주노총 경북본부장), 김석진(44. 현대미포조선 해고자), 남만진(47.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사무처장 겸 정치위원장), 노회찬(49. 당 사무총장), 단병호(56. 전 민주노총 위원장), 이문옥(66. 당 고문 겸 부패추방운동본부장), 이선근(51. 당 민생보호단장), 장봉주(45. 전노련 부의장), 정태흥(33. 반미넷 대표), 천영세(62. 부대표) 등 이상 11명 

◆ 여성명부 : 김미경(33. 학습지노조 대교지부 충청지회 교육선전부장), 김수정(35. 변호사. 당 인권위원), 석윤수경(37. 당 중앙위원), 송경아(35. 소설가), 심상정(46. 전 금속노조 사무처장), 이영순(43. 현 울산시지부 여성위원장), 이정미(39. 당 소파개정운동본부장), 이주희(26. 현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4학년), 최순영(52. 당 부대표), 현애자(42.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전 회장) 등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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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는 질서보다 우선한다"는 홍세화님의 글을 좋아하는 회사원입니다. "모근 국민이 기자"라는 오마이뉴스의 모토에 공감하면서도 글을 쓴다는 것, 더구나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기에 기자로 등록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되도록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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