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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71) 씨가 3월 1일(미국시간) 오후 7시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71) 씨가 3월 1일(미국시간) 오후 7시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 김명곤
감시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100리 떨어진 삼릉으로 이사해 살던 백도선이 해방을 맞은 것은 13세 때였다. 해방된 조국은 백도선 가족의 찌들린 삶에도 당장 '해방'을 안겨다 주었다. 북에 들어와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백도선의 아버지에게 '혁명가' 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건설상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고 했다.

대우는 황송할 만큼 융숭했다. 아침 저녁으로 승용차를 보내 혁명가 백기환을 출퇴근시켰다. 쌀은 물론 갖가지 먹을 것 입을 것과 집도 제공되었다. 어린 백도선은 어리 둥절하기만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쫓기던 생활만 해 오던 아버지가 요샛말로 '뜨는' 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버지는 '미국의 스파이' 라며 잡혀 갔다.

어느날 남쪽에서 김구 선생이 밀사를 보냈는데 그 밀사는 명주천에 김구 선생의 '어서 내려 오라' 는 밀서를 써 갖고 왔다. 기독교인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체질에 맞지 않았던 백기환은 즉시 명주천에 밀서를 써서 '가겠다' 며 내려 보냈다. 그런데 38선을 건너다 그 밀사가 그만 붙잡히고 만 것이다. 백기환은 즉시 체포돼 평양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김일성의 배려로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별을 보며 남으로 향하다

풀려나서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백도선을 마당으로 불러 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너 저기 별 보이냐"고 물어보시더니 "내일 저 별만 보고 당장 이남으로 내려 가라"고 백도선에게 명령했다. 백도선의 나이 14세 때였다.

사고무친으로 서울에 온 백도선은 '피난민 고아'나 다름없었다. 백도선은 거리를 전전하다 빈민들이 모여 살던 왕십리에 단칸방을 겨우 마련했고, 얼마 후 아버지가 네 식구를 이끌고 남녘으로 내려 왔다. 가족들은 그나마 여섯 살배기 막내 동생을 어딘가에 놓쳐버리고 왔다.

후에 북에 살다 남하한 어느 분을 만나 여섯 살배기 그 동생이 홀로 집에 돌아와 있더라는 얘기를 듣고 백도선의 가족은 가슴을 쳤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이후로 아버지 백기환 지사는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을 도와 새나라 건설에 앞장섰으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정치판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비벼 살며 하루 하루를 견디는 중에도 백도선은 공부를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도선은 따로 떨어져 나와 신당동에 문칸방을 얻어 배명중학교에 보결로 입학해 향학열을 불태운다. 이때 백도선은 광교 조흥은행 옆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자신의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계까지 담당해야 했다.

'고구마 세 알' 싸들고 해군 입대

그러던 어느날 회현동 해군본부 앞을 지나는데 게시판에 '해군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당시 16세이던 백도선은 '밥 걱정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이를 17세로 속여 응모해 무난히 합격했다. 며칠 후 백도선은 어머니가 '가다가 요기하라'며 싸주신 따뜻한 기운이 식지 않은 고구마 세 개를 기차에서 풀어 먹으며 진해로 향했다. 백도선은 이 '고구마 세 알'의 모정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백도선은 해군에 입대해 '신호병' 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해군 인사본부에서 '발광 신호나 수기 신호 '최고수' 하면 백도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에서 별난 특기로 인정을 받게 된 백도선은 신이 났다. 밥 걱정 잠 걱정 해결에 모두 인정해 주는 특기 사병이 되었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도선은 이 신호 특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백도선이 해군에 입대한 지 1년 3개월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종종 일본에 가서 배를 인수하는 일에 신호병으로 파견되던 어느 날, 백도선은 3개월 훈련일정과 함께 이번에는 미국 샌디에이고로 파견된다. 샌디에이고에서 3개월 훈련이 끝나고 귀로에 오르기 하루 전날 백도선은 약간 풀어진 기분으로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던 이모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 잘못이었다. 2,3시간 거리인줄로만 알고 출발한 백도선은 한참을 달리고서야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다시 되돌아 가기에 버스는 너무도 멀리 달려 와 있었고, 하루 반나절을 걸려 다음날 아침 6시에 샌프란시스코 이모집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네가 도선이냐!" 며 반겨 맞아 준 이모에게 백도선은 아침을 먹자 마자 사정을 말하고 다시 버스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12시까지 귀대해야 했다. 조금 늦으면 배가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백도선은 식구들의 선물을 사라며 이모로부터 받은 3백불을 받아 들고 가슴을 졸이며 귀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참을 달린 끝에 버스가 백도선을 내려 놓은 곳은 애리조나였다. 애당초 영어 한마디 못하던 처지에서 중간에 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백도선은 운전사에게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다음날 아침 일찍 샌디에이고로 가는 첫 차가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뜬눈으로 버스역 부근의 호텔에서 밤을 지샌 백도선은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샌디에이고로 갔다. 도착해 보니 이미 배는 떠나고 없었다.

백도선은 훈련 중 누군가가 '배가 귀로 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즉시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 간 백도선은 바닷가 호텔의 꼭대기층을 잡아놓고 창에 목을 드리우고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낮에는 호텔 꼭대기 방에서, 밤에는 항구를 빙빙 돌며 무려 15일 동안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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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3월 4일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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