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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 <아름다움을 훔치다>
김수남 <아름다움을 훔치다> ⓒ 디새집
30여년 동안 "눈물의 렌즈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훔"쳐왔다는 사진작가 김수남. 그는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한 이유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그 스스로 지난 70년대부터 숨가쁘게 진행된 산업화 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무너져 가는 우리의 옛것에 대한 지킴이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김수남은 그때부터 카메라 하나를 달랑 어깨에 둘러메고 예인들을 찾아 미친 듯이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한다. 사실 지금에 와서야 그들을 예인들이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들은 세상의 관심 밖에서 차가운 세월을 견디며 묵묵히 기예를 닦고 있는 광대 패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수남은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전통과 예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진정한 예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산업화'와 '현대화'란 이름 아래 사라지기 전에 한시라도 바삐 카메라에 담아 놓아야겠다는 조급함으로 찍고 또 찍었다. 단순히 그들의 기예만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까지도 송두리째 찍었다.

"저는 가끔 장어라는 물고기를 생각합니다. 이놈도 연어처럼 민물에서 산란해 바다에서 크고 다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종입니다. 다 자란 놈이 값이 나갈 것 같은데 오히려 투명한 댓이파리처럼 작은 치어들이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합니다."

왜요 라고 물으면 김수남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이 이 치어를 사다가 일본의 강가에 풀어놓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장어란 놈은 바다로 돌아가도 언젠가 산란을 할 때가 되면, 자신이 자랐던 강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 나라가 아닌 일본의 강으로 찾아"든다고.

김수남은 우리의 문화 예술도 바로 장어의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문화 예술에 대한 기초 투자와 저변 확대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 고유의 전통과 민족성이 골고루 배인 찬란한 문화 예술을 꽃피울 수 있기 때문에.

"김수남의 마력. 그것은 바로 인간적인 흡인력이다. 무당이건 춤꾼이건 상관없이 김수남을 만난 사람들은 불과 몇분 사이에 그에게서 피붙이의 정을 느낀다…천대 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무당들이나 예인들, 산골이나 어촌의 민초들 삶의 상황과 정서 속으로 자기가 먼저 빠져들고, 정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바로 사진가 김수남의 모습인 것이다." (김인회, 전 연세대 교수, 굿학회 회장)

밀양 백중놀이의 한 장면
밀양 백중놀이의 한 장면 ⓒ 디새집
사진작가 김수남(55)이 우리 나라의 대표적 예인 11명에 대한 글과 생생한 사진을 담은 사진 에세이집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를 펴냈다. 제주 큰심방(무당) 안사인과 곱사춤의 공옥진, 광대 이동안, 만신 김금화, 명창 김소희, 도살풀이 김숙자, 범패승 박송암, 동해안굿 신석남, 학춤 한영숙, 가야금 산조 성금연, 밀양 양반춤 하보경이 그 분들이다.

이들 11명의 예인들은 그동안 미신 타파라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천대와 무관심을 묵묵히 견뎌내고, 그들만의 예술적인 끼와 재능으로 우리의 전통 예술의 참모습을 그대로 이어온 분들이다. 그래서일까. 김수남의 사진 또한 잊혀진 기억 속의 한 장면을 힘겹게 복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흑백으로 가득하다.

1981년 음력 2월 보름, 멍석을 깔고 지낸 바닷가 천막에서의 이틀 밤 사흘 낮. 양력으로는 3월인데도 갯바람은 무서웠다. 그곳,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는 내가 무혼굿을 처음 본 현장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안사인 심방(제주에서는 무당을 신의 성방이라 하여 심방이라고 부른다)을 따라 간 곳은 바닷가 자그마한 마을 입구 골목에 쳐놓은 천막 안이었다.

굿은 바닷속에서부터 바닷가, 바위 위, 그리고 천막 안을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내어 극락으로 보내주기 위한 굿이다. 이 고산에서 나는 무혼굿을 보며 많이 울었다. 비명에 떠난 사람도 그렇지만 한창 때의 아들을 먼저 보낸 노모와 가족들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굿을 금지하던 시절에 굿판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의 눈물은 굿을 요청하는 가족들이나 굿을 하는 무당들과 나의 사이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를 연결시키고 통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눈물과 마음은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 지금도 동일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와 사회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함께 하면 모두가 사진 찍는 것을 도와준다. ('그 몸을 통과하는 제주의 신들 안사인' 몇 토막)


사진작가 김수남은 누구인가?
30년 넘게 한국의 굿 찍어온 큰무당

▲ 김수남
자유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김수남은 1949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동아일보> 기자, 일본 류큐대학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의 굿에 대한 사진을 30년 넘게 찍었다.

그 뒤 일본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오키나와 민속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의 오지로 카메라의 앵글을 돌린 지도 20년 가까이 된다.

펴낸 책으로는 <한국의 굿> 20권, <한국의 탈><민속놀이><전통 제례><제주 바다와 잠수의 사계><아시아의 하늘과 땅> 등 40여권이다. 일본 히가시가와 사진상 해외 작가상 수상.
그랬다. 김수남은 굿을 벌이는 무당과 굿을 신청한 가족들과 함께 울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굿거리 장단에서 예인의 영혼을 훔칠 수가 있었으며, 그 영혼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가 제주도 고산에서 '큰심방'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그 때문이다. 김수남은 "통곡과 신음 같은 슬픔의 소리가 들리는 곳, 몸져누운 망자의 노모 앞에서 차마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무사(왜) 저 심방은 굿 준비는 안하고 울기만 허염수광"이라고 했다. 그때 안사인 심방이 "큰심방은 이땅(이따가) 큰굿 할 때 헐꺼우다"라며 그를 큰심방으로 추켜세웠던 것이다.

밀양은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농경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땅이 비옥한 만큼이나 양반과 지주의 세도가 강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작농이나 머슴들이 많았고 이들이 주인이 되어서 자유롭게 지내는 머슴날이 생겨났다.

1년 내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양반들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던 머슴들이 양반의 허락을 받아 마음껏 마시고 춤추고 놀 수 있는 이날은 말 그대로 머슴날이었다./하회 별신굿이 양반의 허락을 받고 서민과 머슴이 탈춤을 추었던 것과 같이 양반 혹은 지주가 허락한 한도 안에서 춤을 추며 하루를 보낸다. ('사내 몸에 든 멋 하보경' 몇 토막)


인용한 글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예인들의 뛰어난 기예와 아름다움만 훔친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 전통 예술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보존'의 가치까지 충분히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책 곳곳에 들어있는, 다소 낡은 듯한 흑백 사진들과 글들은 예인들의 예술성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찍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김수남이 펴낸 <아름다움을 훔치다>는 오래된 장맛 같은 글과 금방이라도 살아움직일 것만 같은 흑백사진을 통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예술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증언은 때때로 낡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쓰레기'로 취급하고 오로지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현대인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훔치다 - 김수남이 만난 한국의 예인들

김수남 지음, 디새집(열림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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