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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의 루구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해지는 호수 풍경
저물녘의 루구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해지는 호수 풍경 ⓒ 최성수
루구호 가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습니다. 내려다보면 아찔아찔한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서면 또 아득한 산이 나타납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산 만도 세 개를 지나야 루구호에 도착합니다.

루구호는 모계사회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는 소수민족 모수족의 마을입니다. 호도협 트래킹을 포기하고 선택한 여행인 만큼 기대가 크고, 또 한편으로는 그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질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실은 꼬불꼬불한 길 때문에 내 마음이 아찔한 것이 아니라, 루구호에 대한 기대와 우려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강에서 루구호로 가는 길에 처음 마주친 산은 수지산(樹地山)입니다.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는 길의 정상에서는 옥룡설산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사천성과 운남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루구호는 그 크기의 거대함 뿐만 아니라 호수 주위에 모여 모계의 풍습을 이어가고 있는 모수족 때문에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루구호 가는 길. 저 아슬아슬한 길을 넘어야 루구호에 이른다.
루구호 가는 길. 저 아슬아슬한 길을 넘어야 루구호에 이른다. ⓒ 최성수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습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이어집니다. 그 골짜기 군데군데 마을이 모여 있습니다. 아스라한 절벽 위에 들어선 집도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꺼지는 것 같은 집 주변에는 푸른 야채밭만이 사람 사는 자취를 보여줄 뿐입니다.

여강에서 처음 만나는 수지산을 지나자 마침 장날인지, 길 가로 온갖 노점상이 모여 있습니다. 야채를 들고 나온 아주머니, 유자를 파는 손수레에, 돼지를 끌고 나온 청년들로 왕복 2차선 길이 막혀버릴 정도입니다.

7일마다 열린다는 장터는 내 초등학교 무렵 우리네 시골 장터와 비슷합니다. 장터 어느 곳에서는 먹음직스러운 국수 국물이 펄펄 끓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루구호 가는 길에 만난 한 마을의 7일 장 풍경
루구호 가는 길에 만난 한 마을의 7일 장 풍경 ⓒ 최성수
몇 개 산을 넘고, 비포장 도로와 미끄러운 눈길을 지나자 눈 앞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납니다. 드디어 루구호에 도착한 것입니다. 맑디맑은 호수의 물은 제 몸을 온통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수족 셋이 노 젓는 배를 타고 라마교 사원에 갔다 옵니다. 노를 젓는 셋 중 둘은 남자, 하나는 아줌마입니다. 배의 모든 운전은 아줌마가 맡아 합니다. 역시 모계사회에 온 것 같은 느낌이 저절로 듭니다.

노를 젓는 아주머니는 서른두 살. 큰 아이는 열여덟 살이랍니다. 억세고 힘차 보이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루구호에서 노를 젓고 있는 모수족 아주머니. 삼십대 초반인데 아이가 18살이라고 한다. 강인한 삶의 의지가 얼굴에 담겨 있다.
루구호에서 노를 젓고 있는 모수족 아주머니. 삼십대 초반인데 아이가 18살이라고 한다. 강인한 삶의 의지가 얼굴에 담겨 있다. ⓒ 최성수
깊이 50미터가 넘는다는 호수는 위압적이기보다는 잔잔하고 평화롭습니다. 물이 너무 맑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물 위에서 어룽대는 저녁 햇살이 눈부십니다. 저절로 눈이 가늘게 감기는 루구호. 맑은 물 위를 갈매기들이 날아다닙니다.

산에서 내려다 본 루구호의 모습. 푸르고 맑은 물과 물에 안긴 산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산에서 내려다 본 루구호의 모습. 푸르고 맑은 물과 물에 안긴 산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최성수
숙소로 돌아가다 들른 서점(책과 음악 시디를 파는 가게)에서 만난 조 사장은 나이 스물 아홉의 한족입니다. 루구호에 오기 전에 소주에서 살았다는 그는 군대 7년, 회사 생활 4년 동안 늘 시간에 매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연히 루구호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왔다가 아예 눌러 살기 시작했다는 그는 처음에는 모수족의 배타성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며 선하게 웃습니다.

“나는 이곳이 너무 좋아. 매여 있지 않고, 물 좋고, 경치 좋고….”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보다 외로움이 더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 숙소의 아가씨가 우리에게 마을 축제에 가기를 권합니다. 마을 광장에서 열리는 그 축제는 춤과 노래의 마당입니다. 골목을 몇 구비 돌아 마을 광장에 이르자 가운데에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고, 모수족의 음악이 분위기를 북돋웁니다.

모수족 청년들과 아가씨들의 춤과 노래가 이어집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모두 고음입니다. 그러나 그 고음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 발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음악에 맞춰 저절로 춤을 추게 됩니다.

춤과 노래가 끝나자 관객과 모수족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로 화답하며 하나가 되는 모수족의 축제는 오래 전부터 이어진 풍습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관광 수입을 위한 축제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모수족 집안. 한국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보는 아가씨들
모수족 집안. 한국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보는 아가씨들 ⓒ 최성수
과거 모수족은 13살이 넘은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 축제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세 살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룻밤을 보낼 허가를 받는 나이기도 합니다.

축제의 자리에서 서로 마음이 맞은 남녀는 하룻밤을 자게 된답니다. 물론 서로 마음에 들면 그런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뿐 남자든 여자든 서로 다른 책임이나 의무는 없답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가 그 아이를 기르고, 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의미가 없고 이름도 모른답니다. 남자는 어머니 집에서 삼촌 역할을 하며 살고, 아이들은 여자들이 부양하며 사는 특이한 모계사회의 전통을 모수족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혼인 풍습을 주혼(走婚)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남녀 사이의 은밀한 마당이었던 마을 축제는 이제는 관광객의 볼거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비록 풍습의 목적은 바뀌었어도 모수족의 밤 축제는 아름답습니다. 모닥불이 사윌 무렵이면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골목길을 돌아 자신의 쉴 곳을 찾아 돌아갑니다.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어둠 속에서는 고개를 들면 쏟아질 것처럼 무수한 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별이 하늘이 아니라 내 눈과 같은 높이에 떠 있는 곳, 내 생에서 가장 많고 선명한 별을 그 곳 루구호에서 보았습니다. 입체적으로 보이는 별무리는 여행자의 마음처럼 시리게까지 합니다.

축제가 끝난 시간, 호숫가로 포장마차가 늘어섭니다. 그 포장마차의 한 귀퉁이에서 산양(山羊) 구이와 조개 구이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서점 사장인 한족 조씨도 불러 함께 마시는 루구호의 밤은 아득합니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자리만큼 먼 곳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모수족 집안에 있는 훈제돼지고기. 6년 된 것이라고 한다.
모수족 집안에 있는 훈제돼지고기. 6년 된 것이라고 한다. ⓒ 최성수
어두운 길을 디디며 숙소로 돌아오다가, 숙소 마당 한쪽에 있는 모수족 가옥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봅니다. 마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수족 아가씨들이 우리더러 들어오라고 합니다.

집 안쪽 벽 가까이에 화덕이 있고, 화덕에는 불이 발갛게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화덕 위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커다란 주전자가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습니다. 아가씨들은 보던 텔레비전 화면에서 아쉬운 듯 눈을 떼며 불 속에 감자 몇 알을 던져 넣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우리나라 드라마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어머, '보고 또 보고‘네.”

제자인 정희가 놀라 소리를 칩니다. 정말 우리 나라에서 얼마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입니다.

‘저 드라마를 모수족 아가씨들이 이해나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겹사돈 이야기였던 그 드라마의 내용이 떠올라서입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 필요조차 없는 혼인 제도를 지니고 있는 모수족에게 겹사돈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도 모수족 아가씨는 그 드라마가 아주 재미있다며 눈을 뗄 줄 모릅니다.

이야기 끝에 모수족 아가씨는 웃으며, 요즘은 외지 사람들이 모수족 남자들을 보러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외지인 여자와 결혼한 남자도 세 쌍이 있다며 웃는 아가씨의 표정이 쓸쓸해 보입니다. 모수족 남자가 여자를 찾아가던 풍습이 관광지로 바뀌고 상업화되면서 외지인 여자와 남자로 변한 현실이 영 탐탁치 않은가 봅니다.

화덕 주변으로 낮은 침상이 몇 개 놓여있고, 집안은 그을음이 가득한합니다. 부엌 쪽 선반에 이상한 것이 가로로 길게 누워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돼지를 통째로 삶아 말린 것입니다. 육년 된 고기라고 합니다. 길게는 십 년까지도 그렇게 고기를 말려놓고 먹는다고 합니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합니다. 귓가에는 여전히 루구호의 밤 별빛들이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격촌의 골목을 휘젓고 있는 돼지들
리격촌의 골목을 휘젓고 있는 돼지들 ⓒ 최성수
이튿날 아침 호숫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리격촌으로 갑니다. 호숫가 마을보다는 덜 상업화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찾아간 리격촌은 온통 공사 중입니다. 이곳도 머지않아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것입니다. 그리고 리격의 모수족 사람들도 그 관광객을 바라보며 삶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관광지가 되기 전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 나직한 호숫가 마을을 내 마음 속에 깊이깊이 간직해둘 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골목길을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몸집 조그만 돼지들도, 마을 둔덕에 올라 바라보던 아침 햇살 일렁이는 물살도, 그저 무심하게 가게를 지키며 팔아도 그만 안 팔아도 그만이라는 듯 앉아있던 젊은 아줌마도,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는 좁디좁은 길을 단 두 사람이 곡괭이만으로 파서 넓히고 있는 모습도 말입니다.

리격촌의 아침. 물살 위에 어룽대는 햇살이 저절로 눈을 가늘게 뜨게 만든다.
리격촌의 아침. 물살 위에 어룽대는 햇살이 저절로 눈을 가늘게 뜨게 만든다. ⓒ 최성수
돌아오는 길, 또 그 아슬아슬한 산길을 넘으면서, 나는 오래도록 루구호의 푸른 물결과 그곳에 깃들어 사는 순한 사람들, 밤새 빛나던 입체적인 별들과, 안정환처럼 긴 생머리를 휘날리던 광대뼈 굵은 모수족 청년들과, 화롯불 가에서 구운 감자를 꺼내주던 모수족 아가씨의 따뜻한 인정들을 몇 번씩이나 곱씹었습니다. 내 생에서 아주아주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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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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