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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 여섯 째 날을 맞은 라디카 씨.
ⓒ 전민성
네팔 더란이 고향인 라디카 수바(34)씨. 그녀는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영국군인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 홍콩에서 산 경험이 있고, 19살 때 결혼한 후 다시 영국군으로 일하던 남편을 따라 홍콩에서 3년을 살았다. 그녀가 태어난 더란은 영국 군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네팔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도시다.

홍콩에서 정식 비자를 받아 계속 살 수 있었지만, 친구들이 "한국이 살기 좋은 곳이니, 한 번 가서 일해 보라"고 해서 그녀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2살된 아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1992년 한국에 왔다.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아들의 이름은 '아바이.' '두려움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처음엔 오산에 있는 K전자에서 3년 일하고, 작년 10월 말까지 동대문에서 봉제일을 했다. 작년 10월 정부가 4년 이상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진출국을 발표하자, 사장이 '2천만원(고용주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고 단속에 걸릴 때 내는 벌금)이 없으니, 일을 그만두라'고 해 일자리를 잃었다. 해고되기 전 그녀는 12년 동안 사진으로 만 보아 온 아들을 한국에 초대하려고 했었다.

"그때는 다시 홍콩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때 샤멀타파 이주지부 지부장을 만났지요. 그가 '우리는 여기서 12년 13년씩 힘들게 일했는데, 우리의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 마음을 바꾸었어요." 그녀는 정부가 합동단속을 시작한 작년 11월 15일부터 명동성당 농성단에 함께 하고 있다.

▲ 두 살때 헤어진 후 사진으로 만 보아온 아들 아바이(14)군. (이 사진은 라디카씨의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다.)
ⓒ 전민성
여든 명 남짓 투쟁단과 두 명의 여성 이주노동자

남성 이주노동자 80여명과 함께 생활하는 농성생활에서 라디카씨는 생리 때와 샤워하기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3평 남짓한 천막 4개가 연결돼 있는 농성천막 한 구석에서 여성동료인 소하나(32·인도네이사)씨와 함께 자며, 한겨울을 났다. 성당에서 제공하는 방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쓸 수 있고, 샤워도 그때 한다.

함께 농성을 시작했던 인도네시아인 냉냉(27)씨는 추위 때문에 건강이 악화돼 지역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우리를 단속해 추방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겁먹지 않아요. 여기서 연행된다고 해도 밖에 있는 우리 친구들이 다시 조직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했어요"라며 결의를 내비쳤다.

"우리를 무시하는 한국정부 나빠"

그동안 한국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한국 사람이 8시간 일할 때, 12시간, 13시간 일해도 월급 차이가 많이 나고, 노는 날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해야 하는 현실"이란다. 하지만 "우리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데도, 정부가 우리 이주노동자를 계속 탄압하고 있어, 지금이 제일 힘들다"며 단속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에 아쉬움을 표했다.

노동기본권이란?

자본주의가 진전되던 시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자, 사용자와 근로자 간에 마찰이 생겼다. 이러한 마찰이 시민질서를 위협하게 되자, 국가가 복지사회국가를 표방하고 근로자의 적극적 보호를 위해 마련한 시책이었다.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을 위시하여 우리 나라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즉, 노동기본권이란 근로자의 생존 확보를 위해 헌법이 보장한 근로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 헌법에 따라 노동기본권은 국가 권력의 간섭이나 탄압을 받지 않는다. 헌법 33조 1항에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근로권,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국가는 근로자의 노동기본권 행사를 간섭하거나 억압하지 않을 의무가 있으며, 노동기본권 행사를 저해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제거할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합쳐 노동3권이라 부르기도 한다.

-리포트 월드 참고 www.reportworld.co.kr / 전민성
"홍콩비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친구 말을 믿고 한국에 왔는데, 지금 너무 힘들어요. '한국 좋은 나라 아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우리 이렇게 힘들게 투쟁하고 있는데, 정부가 모른 체 하고 있구나'하는 마음이 들어요. 여기 있는 시민들에게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정부가 우리를 무시하는 거잖아요."

"이제 우리는 하나 하나가 샤멀 타파"

"지난 일요일(2월 15일) 1시 반에 지역마다 모여서 전체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샤멀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1시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어요. 그리고 잡혀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못 믿었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혼자 있을 때 납치한 거잖아요."

"'납치하면 농성단이 깨진다'고 생각했나 봐요. 샤멀 대표가 잡혀갔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 하나가 샤멀 타파'라고 생각해요."

▲ 라디카씨가 수첩속에 간직한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이 사진은 라디카씨의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다.)
ⓒ 전민성
"정부는 강제 연행하겠다고 하고, 만약 그렇게 해도, 우리는 겁내지 않고 끝까지 권리 쟁취할 때까지 싸울 거예요." 라디카씨의 두 눈이 강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엿새째 소금과 물로만 지탱하고 있는 그녀는 '몸에 힘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가난한 나라에서 와서 가족들을 위해 고생하고 있잖아요. 이주노동자도 한국노동자와 똑같은 노동자예요." 그녀는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인정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와 많이 연대하고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 고민해주었으면 해요. 이주노동자들을 잘 모르는 한국노동자들이 많지만, 우리를 똑같은 노동자로 생각하고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 한국에서 만난 네팔인 남자친구 찬드라 (34)씨. 함께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 전민성

덧붙이는 글 | * 23일 명동성당에서 직접 인터뷰 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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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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