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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목월길만 남았다.
이제는 목월길만 남았다. ⓒ 황평우
2월 23일 박목월 선생이 말년을 보내며 집필 활동을 했던 원효로 집을 찾았다. 원효대교 진입 직전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목월길'이라는 도로표지다.

그러나 이제는 목월 선생도 가버리고, 집도 헐리고, 이 표지만이 목월 선생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줄 것이다. 헐린 집을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성심여고 정문 왼쪽에 이미 철거된 후 현장을 가리기 위한 천막이 둘러쳐 있었다. 빈터 어디를 둘러보아도 목월 선생의 유품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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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월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이 집을 지키고 있던 목월 선생의 '시비'는 보이지 않았다. 목월 선생과 함께 했던 이름 모를 나무는 허리가 잘려져 제 생명을 다하고 있음이 마치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옥상을 열어준 인근 주민은 “철거할 때 이곳을 목월 기념공원으로 보존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건물신축 때문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통화가 힘들었던 박동규 교수와 어렵게 통화가 연결되었다.

- 소유자가 어떻게 변경되었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집은 동생(박남규)의 소유였다. 동생이 사업에 실패해서 경매로 넘어갔다. 내 아내(송영자)가 빚을 얻어서 2001년 낙찰받았다. 2002년 건축업자와 집을 짓기로 하고 2002년 5월 건축허가를 받았다. 그동안 세 번이나 건축을 연기했다. 목월 선생이 시작한 '심상'이 들어가도록 해 보았으나 경제 가치도 없었고 빚이 늘어나 견디기 힘들었다."

- 서울시에서 매입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는가?
"2004년 2월 14일 철거 신청을 용산구청에 했다. 철거하기 10일 전쯤(2월 16일)에 서울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고 매입의사가 있다고 연락이 왔으나 서울시가 매입해줄지 믿기 어려웠다."

- 서울시나 용산구에 매입 요청을 한 사실은 있는가?
"서울시에는 연락하지 않았고, 용산구에 한번 전화는 했다. 문화재 지정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용산구는 문화재로 지정되면 관리비가 나온다고 답변했다. 관리비로는 내가 처한 경제적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 서울시는 매입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울시와 협의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목월 선생이 말년을 보낸 집이 헐리는 것이 아쉽지 않은가?
"그 집은 1965년 아버지와 함께 지은 집이다. 아쉽지만 버틸 만한 힘이 없었다. 우리는 2년 전부터 신축 공사를 준비해 왔다. 갑자기 지금 와서 매입한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아버지의 책과 유품들을 2월초에 모두 옮겼다."

박동규 교수와 사실 확인을 한 후 서울시 한국영 문화재과장과 다시 전화 통화를 했다.

- 서울시가 너무 늦게 대응한 것 아닌가?
"서울시는 2003년 12월 빙허 현진건 고택이 철거된 후 각계에서 심한 질책을 받았다. 죽을 맛이었다. 늦었지만 건물사적 가치가 없어도 근대 문화예술인들의 생가와 집필활동을 했던 집들에 대해서 보존대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목록화 사업을 했는데 700여 곳이 된다. 그 중 시급히 보존할 곳 13곳을 선정했다. 박목월 선생의 원효로 집도 포함되었다. 2004년 1월 박목월 선생의 원효로 집의 실제 소유주인 송영자씨와 접촉을 했다. 그러나 송영자씨는 문화재로 지정받기 원하지 않는다며 문화재 조사 자체에 응하지 않았다.

목월과 함께 했을 이름모를 나무가 생명을 다했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흡사하다.
목월과 함께 했을 이름모를 나무가 생명을 다했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흡사하다. ⓒ 황평우
목월 선생집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준비를 하고 있는데 2월 14일 용산구청에서 '멸실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해서 2월 16일 박동규 교수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매입을 권유했고 피해를 줄이는 노력을 하겠으니 보존 대책을 세우자고 했다.

2월 20일(금) 다시 연락을 했다. 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더니 '현재 소유주는 부인이기 때문에 나는 권리가 없다. 부인과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2월 21일(토) 용산구청에서 '건물철거 철회신고'가 접수되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는 보존을 위한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을 예상하고 밤을 새워 계획을 작성했다. 23일 보도자료까지 만들었다.

2월 23일(월) 오늘 아침에 보도자료를 모두 배포했다. 나는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기자실로 갈 준비를 하면서 박동규 교수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지시했다. 그러나 박동규 교수와 통화한 직원에게서 받은 보고는 21일(토), 22일(일) 양일 간에 걸쳐 이미 철거를 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배신감과 허탈감으로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 기자회견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이미 배포한 보도자료를 모두 회수하고 사실을 그대로 발표했다. 박동규 교수에게 아쉬움이 많다."

- 건물 멸실 신고 철회를 해놓고 일방적으로 철거하면 어떻게 되는가?
"과태료만 부과하게 된다. 용산구청에서 과태료를 부과할 것이다. 금액은 겨우 30만원 정도다."

- 50년이 지난 건물에 대해 철거 허가제를 도입하면 어떤가?
"실질적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법을 만들기 얼마나 어려운데.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자는 사실 확인을 위해 어렵게 박목월 선생의 며느리인 송영자씨와 통화했다.

- 서울시에서 매입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2년 전부터 건물 신축을 위해 애써왔다. 2003년 11월 이미 건축업자와 계약을 끝내고 겨울이 지나면 공사하기로 했다. 지금 와서 사유재산을 서울시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 목월 선생이 마지막으로 집필하셨던 곳이고 의미가 있는 곳 아닌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관리비만 주겠다고 했다. 목월 선생의 생가는 경주에 이미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큰 의미도 없는 곳이다. 1월에 문화재조사 나올 때도 우리는 문화재 지정을 원하지 않았다."

- 지난 21일 건물 멸실 철회 신청을 했는가?
"용산구청에 전화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 건물 멸실 철회 신고를 했는데 어떻게 일방적으로 철거를 했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건축업자와 계약을 했고 우리가 집안 사정으로 어려웠다."

목월이 말년을 보낸 집이 흔적없이 철거되어 버렸다.
목월이 말년을 보낸 집이 흔적없이 철거되어 버렸다. ⓒ 황평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인터뷰였다. 서울시가 좀 더 신속하고, 확실하게 노력했다면 하는 아쉬움과 '문화재 가지정' 조례를 만들어 놓고도 활용을 못한 점 등. 목월 선생 집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떠나서 근대 문학인의 삶과 집필 현장 보존에 대한 노력을 못한 후손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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