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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9일부터 1월 23일까지 녹색문화기금 프로그램으로 쿠바를 다녀온 그린네트워크 장원 대표가 쿠바방문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에는 쿠바의 환경, 유기농 실태, 사회복지 등을 비롯해 쿠바 거주 한인들의 생활상 등도 소개됩니다. 장 대표의 연재는 모두 7회 정도이며, 이 기사는 그 세 번째입니다....편집자 주

▲ 체 게바라의 장남인 까밀로 게바라.
ⓒ 장원
살아생전에 쿠바혁명을 주도했고, 죽어서도 쿠바를 먹여 살리는 체 게바라는 쿠바의 절대 은인이다. 쿠바는 온통 '체'로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거리는 물론이고, 아파트 벽에도, 온갖 기념물에도, 학교 교실에도, 사무실에도, 그리고 쿠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까밀로 게바라 마치(Camilo Guevara March·41). 체의 큰아들이며 현재 '체 게바라 연구센터'의 부소장격인 그를 지난 1월 21일 오후, 센터 2층(체 게바라가 생전에 서재로 사용하던 방)에서 만났다.

- 아버지하고 별로 안 닮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춤도 못 추고, 술도 못 먹었다. 시는 잘 썼지만.(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인이었다. 나는 럼도 잘 마시고 춤도 잘 추는 쿠바인이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 없다. 내가 세 살 때 볼리비아로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생각하면 기억이 아스라해 그냥 꿈만 같다.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일시 돌아왔을 때도 변장을 하고 있어서 잘 몰랐다.

그러나 항상 농부 출신의 남자 셋이 아버지 대신 우리를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집에 없는 것에 대한 결핍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워하지는 않았다."

- 살아오면서 아버지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나이가 어렸을 때는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다. 이제 내 나이 마흔 하나, 부담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그 시대를 마크한 하나의 이정표이자 시대적 당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내 가족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는 너 자신이 중요하다고 늘 얘기했다. 나는 나일 따름이다. 이제 체의 영적인 딸 아들들이 이 세상에 많다. 부담을 혼자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 세이 선 오브 체!(Don't say son of Che!)"

- 요즘 당신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가?
"아버지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 동안 살았던 이 집이 지금은 '체 게바라 연구센터'가 되었다. 아버지의 개인 장서도 여기에 다 있다.

나는 지금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체의 사상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학술적인 파트와, 필름, 비디오, 인터넷 등을 통하여 체의 사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홍보 파트가 있는데, 나는 홍보 파트의 책임자로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센터의 바로 건너편에 새 센터를 짓고 있는데, 체와 관련된 모든 연구나 행사들이 앞으로는 이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나눔을 위한 공간도 준비되고 있다. 완공은 체의 생일인 올 6월 14일이다. 그래서 사실 요즘 좀 바쁘게 지내고 있다."

▲ 게바라가 살아생전 거주하던 집. 현재는 '체 게바라 연구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 장원
- 다른 가족들은 지금 뭐하나?
"큰누나 일디타는 39세에 죽었는데 펜클럽에서 일했다. 둘째 누나는 소아과 의사이고 내 아래 여동생은 수족관 의사, 그리고 남동생은 변호사다. 제각기 자기 길을 찾아 잘 살고 있다. 아! 참, 엄마 알레이다 마치는 현재 이 센터의 소장이다."

-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나?
"늘 같이 있지는 못 했지만 애를 넷이나 가지지 않았는가? 충분하지야 않았겠지만 서로를 '엔조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와 아버지는 게릴라전에 함께 참가한 혁명의 동지였다. 볼리비아로 갈 때도 엄마가 같이 따라가려 했으나 안전해지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말렸다고 한다. "

- 미국은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지 미국 사람들은 쿠바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미국은 무소불위의 제국이 되었고, 제국의 본질에 따라 행동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언제든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서로 미워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다. 양국간에도 곧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있을 것이다."

▲ 사후 40년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전세계인들에게 '혁명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체 게바라.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킴'이라는 한국 사람과 어업 분야에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은 대단히 흥미있는 나라로 특히 전통문화가 오래되었고 멋있는 것 같다. 쿠바와는 감성적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분단국가로서의 아픔이 클 것이다. 비디오나 뉴스를 통해서 주로 한국을 접하는데 한국 노동자들을 존경한다. 과거에는 경찰이 노동자들을 몰아붙였는데 요즘은 거꾸로 노동자들이 경찰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웃음) "

- 체는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죽으려고 의도한 적도 없었다. 전쟁을 하면 으레 죽을 확률이 높다. 전쟁하다가 그는 그렇게 갔을 뿐이다. 사실 체가 볼리비아로 떠날 당시 쿠바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혁명의 기둥이 이미 세워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제국주의의 압제가 가장 심한 볼리비아를 결국 선택했다. 그리로 간 것은 하나의 전략이기도 했다.

당시 쿠바는 너무 허약했고, 그래서 체는 다른 곳에서 작은 게릴라 전쟁을 일으켜 미국의 관심을 쿠바로부터 돌리려고 했다. 그리고 체가 쿠바를 떠난 것은, 혁명이 성공하면 쿠바를 떠나 또 다른 혁명의 길로 나아간다는 카스트로와의 처음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하다. "

- 카스트로가 혁명 성공 이후 체를 일부러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노!(단호한 어조) 둘 사이에는 어떤 긴장 관계도 없었다. 심지어는 카스트로가 체를 죽이라고 했다는 볼리비아 라디오 방송도 있었지만 그것은 100% 선전전이고 음해였을 따름이다. 체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카스트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어 보라. 사람들은 이 부분에 관한 한 헛짚어도 너무 헛짚고 있다. 두 사나이의 관계는 오직 혁명 그리고 우정이었다."

- 체는 이 세상에 뭘 남겨주었다고 생각하나?
"아버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싸움에서 늘 선봉에 섰다.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하트를 주고 싶어했다."

▲ 게바라의 두번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
ⓒ 장원
- 체가 의도했던 대로 쿠바가 잘 가고 있나?
"그대로는 안 되고 있다. 체는 노동의 노예가 아니라 노동을 진정 사랑했다. 자발적 노동을 선호했다. 지금 쿠바인들은 그러한 체의 자발적 노동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 당시와는 다른 생산 방식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쿠바 자체가 아주 복잡한 사회로 변하고 있다. 세계가 너무 변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몰락도 큰 영향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존속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쿠바의 생존 자체가 지금은 중요하다. 풍전등화다. 지금은 이상적 해법을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처음 생각도 중요하지만 진화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쿠바의 생존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 때 까밀로 마치의 엄마이자 체 게바라의 둘째 부인인 알레이다 마치가 방으로 들어왔다. 후덕한 모습의 여장부 스타일이다. 까밀로는 아버지보다는 엄마를 더 닮았다)"

- 앞으로의 개인적 계획은? 정치할 생각은 없나?
"연구 센터에서 내 맡은 바 일을 할 것이다. 6월의 준공식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 체가 직접 찍은 사진이나 각종 자료들을 갖고 한국을 한 번 방문하고 싶다.(귀국 후, 녹색문화기금(www.ngu.or.kr)에서는 정식으로 까밀로와 알레이다를 초청했다.) 그리고 나는 정치를 할 생각이 따로 없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치하고 있지 않은가? "

-체의 사상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Revolution to the Victory Always! 승리의 그 날까지 한결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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