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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느릿느릿 박철

오늘 우리집 큰아들 아딧줄이 중학교 졸업을 했습니다. 아딧줄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시골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늦게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거나 잘 먹고 튼튼하게 자라 주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기를 쓴 덕분에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글쓰기를 잘했습니다. 시골에서만 살다보니 과외나 학원을 다녀본 적도 한번도 부모 속을 썩인 적도 없었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척추장애로 불편한 할머니를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휠체어를 밀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사내 녀석이 엄마 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저녁 설거지를 해서 한동안 주부습진에 걸리기도 했었지요.

단돈 천원도 허투루 쓰지 않고 초등학교 때부터 짠돌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저축을 생활화 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아딧줄에게 “너는 왜 용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니?”하고 묻었더니 “이담에 커서 대학에 갈 때 등록금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시골교회 목사여서 자기 뒤를 밀어주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작년 봄 아딧줄이 느릿느릿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입학하고 난 후 처음으로 나만의 저금통장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도 학교에 저금은 물론 하였지만 부모님이 돈을 주셔서 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용돈을 아껴서 저금을 하여서 내 손으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야겠다는 희망찬 꿈을 안고 시작하였다.

ⓒ 느릿느릿 박철

중학교 1학년 이후로 지금까지 한달에 한번씩은 용돈을 쓰고 남은 돈을 꼬박 꼬박 예금을 하였다. 통장에 늘어가는 잔액과 이자를 보며 나의 꿈과도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간다고 생각하니 예금을 할 때마다 뿌듯하고 보람찼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훗날을 위해 저금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목표를 바라보며 저축을 생활화한다면 나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나의 통장에는 177만8120원이라는 돈이 들어있다. 부모님은 2년 조금 넘는 동안 많은 돈을 예금했다고 칭찬해주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은 돈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용돈을 아끼며 꿈을 위해 조금씩 예금을 하며 이런 돈을 모은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지금 나의 통장을 보면 통장에서 찾은 돈이 단 1원도 없다. 꼭 필요한 것이 생겨서 찾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의 속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인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나 생각하며 욕구를 자제 시켰다.

내가 앞으로 얼마만큼의 돈을 저축할지는 모르겠지만 목표를 위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도 저축을 생활화 할 것이다. 나의 보물 1호 저금통장, 이것은 분명히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성공의 지름길이요, 성공의 열쇠이라고 확신한다."


ⓒ 느릿느릿 박철

아딧줄은 어려서부터 속이 깊었습니다. 자식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오늘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딧줄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아딧줄이 새벽에 일어나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내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아딧줄이 왜 잠이 오지 않는지 짐작할 것 같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아딧줄은 다음주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시골목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외국유학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보내는 경비보다 많이 들지 않습니다.

졸업식장은 축하객들로 붐볐습니다. 아딧줄은 덩치가 커서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딧줄은 인천광역시 교육감상을 받았습니다. 상보다 더 소중한 것은 중학교 졸업장이었습니다. 아딧줄의 졸업장에는 아딧줄의 꿈과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딧줄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 훌쩍이면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딧줄의 중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엄마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의 증표를 남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늦게 결혼해서 아기를 많이 기다렸었는데 몇 번 어려운 일을 겪고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해서 마음고생을 좀 한 편이다. 1987년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 때 서원기도를 했다.

'하느님이 아기를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그리곤 입덧인줄도 모르고 민물고기 회를 너무 먹고 싶어 해서 남편이 얼음을 깨고 보쌈을 놓아 잡아준 민물고기 회를 맛있게 먹었다.

ⓒ 느릿느릿 박철

그해 5월 5일 대구에서 있은 시동생의 결혼식에도 몸조심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참석을 못 했다. 유산기미가 보인다지만 병원이 멀고 갈 형편이 안 되는 딸의 형편을 아시는 친정엄마의 수고도 컸다. 경동시장에서 연근과 우엉을 사서 부쳐주셔서 연근생즙을 장복했다. 그래서인지 뱃속에서 애기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출산비용이 걱정이 되어서 그해 교역자 의료보험에도 들었다.(지역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이라.)

병원에는 가보지 못하고 정선보건소에 한 달에 한번씩 갔다. 초산이고 노산이라서 걱정이 되어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운동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네 고추를 따 주기로 하였다. 속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은 부른 배로 고추를 따는 내가 안쓰러워서 말리셨지만 나는 운동으로 생각하면서 열심히 고추를 땄다. 칭찬도 많이 받고 고춧가루도 듬뿍 받았다. 일석삼조가 아닌가.

10월 7일이 출산예정일이라서 10월 3일 혼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좌석표를 구하지 못해서 입석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배부른 저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자리를 양보할까봐 문밖에 서서 오다가 서울 가까이 오자 빈자리가 생겨서 자리에 앉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라 잠실 친정으로 가는 데 거리에는 많은 환영준비가 있었다. 마치 나와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는 듯이….

ⓒ 느릿느릿 박철

교역자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병원을 찾았더니 천호동에 있는 강동성심병원이 있었다. 의사에게 자연분만이 가능한지를 물어봤더니 가능할 듯도 하다면서 진통이 시작되면 오라고 한다. 예정일인 7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루하루 지나니까 정선에 혼자 두고 온 남편도 걱정이 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기가 왜 아직 소식이 없냐고 물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더는 못 참고 혼자 병원으로 갔다. 아기를 낳으려고 왔다고 하니까 입원을 하라고 한다. 입원을 한 뒤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분만대기실에 오신 엄마에게 얼마나 아파야 아기가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하늘이 노랗게 보여야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늘이 안 보이고 형광등만 보이니 힘들겠다고 했더니 아직도 그렇게 여유가 있는 걸 보니 한참 걸리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생각하길 '그래 얼마까지 아픈가 한번 보자'생각하며 진통을 즐기기로 했다. 찬송을 하며 '아, 이 정도' 기도를 하며 '아, 아까보다 조금 심하군!' 소리를 지르며 '아프지만 참을만하데!' 진통의 간격도 체크하고 다른 산모들 진통하는 소리, 우는 소리도 듣고…. 진통도 재미있었다.

ⓒ 느릿느릿 박철

아기가 곧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분만실로 갔는데 기운이 다해서 아기가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힘주라는 소리에 힘을 줘 봤지만 정신을 잃었다가 찾았다가 하다가 결국 우리 아딧줄의 머리가 집게의 도움을 받고 세상에 나왔다. 아기를 낳고 내가 물었다.

'손가락 발가락 10개 다 있어요?' '예, 다 있어요.' 의사가 밖에 나가니 걱정하시던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께서 '산모는 괜찮아요?'(친정엄마) '애기는 어때요?'(시어머니)

그해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의 생신은 아딧줄이 생신선물이었지만 생신상은 차릴 수 없었다. 아딧줄이 음력 9월 10에 태어났고 퇴원하는 12일은 시어머니 생신, 14일은 친정아버지의 생신이라서 산후조리 하느라고 친정집에 있었기에…. 그렇게 태어난 아딧줄이 오늘 중학교 졸업하게 되었다. 건강하게 자라준 아딧줄에게 고맙다고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딧줄이 이만큼 건강하고 바르게 자란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덕입니다. 아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아딧줄을 장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아딧줄에게 해 준 것은 버럭 소리 지른 것 밖에 없습니다. 못난 아비로서 아내에게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오자 아딧줄이 말합니다.

“아빠, 저 오늘 친구들과 놀다오면 안돼요?”
“그래, 몇 시까지 들어올 수 있는데?”
“…저녁 8시요.”
“너 오늘 친구들이랑 술 먹고 놀라고?”
“…모르겠어요.”


ⓒ 느릿느릿 박철
그래, 사랑하는 아딧줄아! 실컷 놀다오려무나. 이제 훌쩍 커버린 네 키만큼 네 인생은 네 몫이니 네가 알아서 하길 바란다. 다만 건강하게. 그리고 밝은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길 아빠 엄마는 소망한다. 사랑한다. 나의 아들 아딧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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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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