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젊은 농부 김군호씨가 자신이 지을 집 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젊은 농부 김군호씨가 자신이 지을 집 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이우성
남쪽 땅끝 해남군 황산면 너른 벌판은 지금 온통 초록이다. 여름은 잠시 쉬고 가을부터 시작된 남녘 농사가 겨울이 되니 한창 절정기다. 김군호씨(35)는 귀농 8년차 농부다. 평생동지 부인 최경미씨(33)와 이수(8), 남수(6)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김씨는 올해 다시 귀농 첫 해의 초심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흩어진 마음을 추스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새롭게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있어 삶이 즐겁다는 그와 즐거운 가족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김씨는 1만5000평 정도의 밭농사를 짓는다. 꽤 규모가 크다. 최근에 마련한 3300평 외엔 모두 임대농이다. 고추를 비롯, 고구마, 잡곡, 감자, 무, 배추, 양파, 마늘, 쌈채소, 시금치 등 해남 농사 특징대로 겨울작물 위주로 경작한다.

직거래 단체의 요청으로 시래기나 무말랭이도 공급할 계획이다. 주로 생협, 한살림, 민우회 생협으로 전량 출하된다. 작년에 흙살림으로부터 전환기유기재배 인증을 받았다. 퇴비, 작부체계가 완전해지는 2005년에는 명실공히 자가 관리시스템을 만들어 유기재배인증을 받을 생각이다.

작년에 군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 공동으로 퇴비장을 만들기 위해 한겨울에도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자신의 땅 3300평도 마련, 올해는 그 터 한 자락에 자신의 손으로 자연친화적인 집도 지을 계획이다. 귀농 후 지금까지 살았던 집은 남의 소유인데 집에 투자하지 않아 이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웃는다.

김씨는 퇴비를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계분퇴비를 주로 쓰는데 올해는 팽이버섯 톱밥을 재발효시켜 쓸 계획이다. 2005년부터는 자급 퇴비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병충해 방제는 주로 잎살림 시리즈 등 흙살림 자재를 쓰고 한방영양제, 생선아미노산, 은행 효소, 목초액은 자가제조해 쓴다.

마을 앞이 바다라 바닷물을 길어와 30배로 물과 희석해 엽면시비하는데, 천연미네랄이 풍부해 마늘과 양파 등에는 효과적이다. 이삭패기 전 겨울 갈대를 잘라다가 계분과 섞어 퇴비를 만들기도 했는데 유기물이 오래 있으니 토양개량에도 효과적인 것 같다.

그는 최근부터 작부체계를 다시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너무 무리하게 농사를 지었다면 이젠 윤작과 녹비작물을 활용하는 등 외부의존도를 줄이려고 한다. 헤어리벳치나 콩으로 지력을 높이고 잡곡으로 많이 돌리려고 한다. 퇴비가 많이 안들어가는 밀과 보리도 면적을 넓힐 계획이다.

특히 유기축산을 위해서 닭이나 돼지를 집에서 키울 것도 고려 중이다. 당장 가능한 몇 마리부터라도 시작하고 싶단다. 왜냐하면 2005년부터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규정에 맞도록 국내 인증 기준을 강화, 보다 친환경적인 요구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김씨는 올해를 그 준비기간으로 삼아 자가축산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것.

농민 입장에서 미리미리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고 나서는 것은 해남흙살림 총무 일을 하면서 흙살림이 추구하는 바인 '농민 스스로 관리하는 인증시스템'에 동의하기 탓일 게다.

그는 올해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말한다. 귀농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2년 동안 해남흙살림 일을 하면서 생각없이 어수선하고 삶에 찌들어 있었던 지난 날을 정리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초월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겼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귀농 3년차 된 김석원씨와의 교유도 그에겐 귀중한 자극제가 되었다. 울타리 안에 갇히지 말고 서로 힘과 마음을 공유하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작년 연수입은 7000만원 정도. 그러나 이 정도 되기까지는 해마다 다음 농사 걱정을 할 정도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8년 전 전세금 1000만원을 들고 귀농해 해마다 까먹다보니 3년만에 바닥이 났다. 아이들 급식비, 자동차에 돈이 제일 많이 들었다. 3년 동안 남의 집 시제를 지내주고 논밭을 얻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한살림 등 직거래 단체와 이미 한 계약물량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심적인 부담이다. 계약량을 맞추기 위해 욕심을 내고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면 부담만 크고 농사도 제대로 안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계약물량도 50%로 줄이고 지역안에서 직거래시스템으로 소비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있다. 품목이 다양하고 겨울품목이 많으니 목포, 광주권 소비자들과 연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작년 가을걷이 행사 때 목포생협연대 회원 100여명이 다녀가기도 했는데 행사하면서 공감대도 넓히고 함께 참여의식도 높여 반응이 좋았다. 그러기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고 지역 특색을 돌아보는 프로그램 개발도 빨리 되어야 한다. 각 지역의 귀농자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생산자와 소비자의 순환고리를 만드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김씨는 말했다.

참 잘 어울리는 김군호씨 부부가 다정하게 서 있다.
참 잘 어울리는 김군호씨 부부가 다정하게 서 있다. ⓒ 이우성
무주가 고향인 그는 건국대 농학과를 나왔다. 대학 다니면서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생명의 농업>을 접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단다. 4학년 때는 벽제 근처에서 텃밭농사를 짓기도 했다. 환경농업에 심취해 졸업 후 바로 귀농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2년간 취직해 있다가 무주 농협영농지도사로 내려가 6개월 고향에서 생활했다.

동생의 소개로 만났던 아내와는 92년 11월에 무주에서 결혼했으나 두 달만에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그후 자연농업협회에 취직해 유통사업을 2년간 맡기도 했다. 그때 알게 된 해남 생산자 분들의 추천으로 지금의 집을 얻어 이곳으로 귀농하게 되었다.

귀농 후 처음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순환이 안 되는 것이 우선 고초였다. 연말이 되면 내년 농사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항상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로지 농사만 지었다. 농사가 삶 자체였다. 7년 동안 집밖을 나가 본적이 없었다.

농사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영농자금을 빌렸다. 지금 집을 빌려준 박남완씨도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줄 정도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농사만 내 일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한 것이 초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밑천이었다.

김씨가 귀농자들에게 제일 말리고 싶은 것은 귀농 후 섣불리 집이나 땅을 무리해서 사지는 말라는 것이다. 7년 동안 자신이 버틴 이유도 집과 땅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집은 최소한의 공간에 장판, 벽지도 꽤 오래되어 보인다. 도배 등은 포기하고 살았다고.

집에 투자하지 말고 빈집을 활용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김씨는 말한다. 우선 살다보면 주변의 은퇴농이나 노는 땅이 많이 나오니 땅 걱정은 하지 않아도 해결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귀농 후 불필요한 투자를 안하는 것이 성공지름길이라고 것.

부인 최경미씨는 서울 토박이다. 귀농 첫 해에는 돌 지난 아이와 뱃속에 둘째가 있어 농사일은 김씨 혼자 몫이었다. 몇 해 지나면서 부인도 농사 짐을 나눠졌는데 점점 잘하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농부로 왔으니 농부로 사는 삶을 기꺼워합니다. 올해는 삽질을 이렇게 잘하네, 1000평 넘게 땅에 고추를 '둘이서만 다 심었네' 하면서 해마다 놀랍니다. 조금씩 내가 해줄 수 있는 농사일이 생겨 다행이구요.”

애들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키우고 평화로운 마음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행복해지고 있는 셈이라는 최씨는 젊었을 때 귀농하길 잘 했다고 말한다. 농사에도 자신감이 붙어 어디를 가도 살 수 있겠다고 자심감을 내비친다.

해남은 1인당 경지면적이 2ha는 될 정도로 농지의 면적도 넓다. 간척지가 되면서 부농도 많다. 환금작물이 많아 너무 돈 되는 작물로 몰리다보니 친환경농업에는 별로 관심들이 적고 농사가 사업화돼 안타깝다고 말한다.

김씨는 자기 자신을 위해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누가 살아주는 것도 아니기에 농사가 내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계산하고 욕심을 내고 이루려고만 하면 내 삶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귀농자 정책에 대해서도 한마디 한다.

“지방마다 군유지가 많아요. 군 사업을 안하는 이상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이므로 귀농자들은 이런 군유지를 잘 활용하기 바랍니다.”

귀농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도 군이 적극 나서서 경작임대를 해주면 좋겠다고 제언한다. 산간 휴경지도 군이 잘 파악해서 귀농자에게 무상 임대해 주면 땅도 놀리지 않아 좋고, 귀농자들은 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좋지 않겠냐고 건의한다.

이들 부부와 아이들은 참 즐거워 보인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밝게만 보이니 즐겁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삶에도 자신감이 생겨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이 생겼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그런 가족의 참 편안한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 그들이 어느 하늘 아래 있건 참 안심이다.

덧붙이는 글 | 모두들 떠나는 농촌에 돌아와 땅을 생명처럼 일구는 젊은 농부를 발굴합니다. 그들이 있어 그나마 오늘 우리 식탁이 안전한 토종으로 지켜지는 지도 모르지요. <흙살림신문>에 함께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