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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항에서 오후 4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시간은 7시 20분. 제주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강윤정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다들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핸드폰이 없는 우리 식구는 낙오병처럼 외떨어져 공중전화를 찾아 헤맸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공중전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이럴 때 핸드폰이 필요하잖어."

작은 아이 인상이는 낯선 제주항의 야경에 멀뚱멀뚱 취해 있는데 큰 아이 인효 녀석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찾아보자. 어딘가 전화 박스가 있을 껴."
"이러다가 날 새겠다. 관리사무소 신세 좀 지지 뭐. 공중전화 박스도 안 보이고, 전화 한 통 신세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내는 앞뒤 꽉 막힌 벽창호 남편을 뒤로 하고 위풍당당하게 관리사무소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다행히도 강윤정씨 남편은 생면부지의 우리들을 위해 객실 출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제주 시청에 근무하고 있는 그 분의 안내로 제주 국제 공항 주변에 자리잡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강윤정씨네에는 서원, 주연 두 딸이 있었는데 우리집 인효 인상이를 좋아라 졸졸 따라 다니며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두 딸아이는 야생마처럼 날뛰고 계룡산 촌 머슴애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습니다.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쫓고 쫓기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습니다. 계룡산 촌놈들도 제주도 섬 머슴아 같은 서원이와 주연이가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좋아라 쫒아다니는데 싫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강윤정씨는 지난 여름 우리 집에서 묵었기에 친분이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처음 대하는 사이라서 좀 어색했습니다. 아이들은 방 한복판에서 머리를 맞대고 주저앉아 뭔가 재밌는 놀이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아빠들끼리는 서먹서먹하니 술잔을 주고받으며 계룡산 어디쯤에 살고 있느니,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시청에 다니는 공무원이니 하는 그저 그런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오빠 동생 해 가며 금세 친해져 있었습니다. 아빠들의 어색한 시선은 아이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풀어졌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좋으면 좋은 대로 표현합니다. 이것저것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한 두 살 어리면 동생이고 한 두 살 많으면 오빠입니다. 다툼이 있는 부부 사이를 화해시키기도 하는 아이들의 사랑의 힘은 생면부지의 어른들을 기분 좋게 이어줍니다. 어른들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속내를 드러내고 말고도 없습니다. 솔직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과 함께 제주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우리 식구를 위해 하루 휴가까지 낸 강윤정씨를 따라 고영석씨 댁으로 안내했습니다. 고영석씨는 강윤정씨의 여고 은사이기도 했습니다. 고 선생은 강윤정씨를 알기 이전에 이미 4년 전, 우리 식구가 생전 처음 제주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신세를 졌던 분이기도 합니다.

4년 전 교직을 그만둔 고 선생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하고 제주시 성읍 2리에 '예림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며 세상사는 재미를 누리고 있습니다.

▲ 예림산방에서 넓은 목장 사잇길 동산에 오르면 바다에 이르는 작은길이 꼬불꼬불 나 있으며 주변은 온통 오름 군락이다.
ⓒ 송성영
예림산방 주변은 크고 작은 오름들로 둘러 쌓여 있어 산책로가 참 좋습니다. 4년 전, '남쪽 나라'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예림산방을 찾아갔을 때 고 선생은 우리 식구를 데리고 바람이 몹시 불어 오는 오름으로 안내했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오름 정상에 올랐을 때의 경이로운 풍경들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크고 작은 오름들 주변에는 너른 초원과 조랑말 목장이 널려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고 선생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주도의 참 모습은 아주 가까운 곳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굳이 돈으로 환산되는 관광지를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 동거미 오름에서 백약이 오름을 바라보면서 찍은 사진으로 멀리 한라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 송성영
계룡산 주변 산기슭에 기대고 살아가는 우리 촌놈들에게는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억새밭이며 조랑말들이며 사방팔방에 널려 있는 화산돌들…. 모든 것이 희한했습니다. 볼거리 투성이었습니다. 새로운 세계, 시선 닿는 모든 풍경들이 경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삼삼한 주변 풍경들과 함께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람의 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주 토박이 예림산방 주인 고영석(52)씨. 몇몇 사람들로부터 '인디언 추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고영석씨는 참 별난 사람입니다. 지금의 예림산방을 3년에 걸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습니다. 주변에 버려진 목재며 돌들을 주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운전 면허증이 없는 고 선생은 고물상처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집을 지을 당시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였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에 벙거지를 푹 눌러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일일이 재료들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본채며 제주도 특유의 초당까지 손수 짓고 나니 어지간한 목수 뺨치는 수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아는 이들로부터의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전히 돈 안 되는 요청들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품이기에 늘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고영석씨가 3년에 걸쳐 손수 지은 예림산방
ⓒ 송성영
고 선생은 본채와 초당에 들어서 있는 몇 칸의 방을 통해 숙박 손님을 받아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숙박 손님이지 우리 식구 같은 돈 안 되는 숙박 손님들도 꽤 있어 보였습니다. 생활을 보장해 주었던 교직까지 그만두었으니 요즘은 생활이 좀 어려운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이 가난한 여행자들에게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같은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고마워했습니다.

우리 식구와의 두 번째의 만남. 사람들의 입소문과 그간 주고받은 메일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서 고 선생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 수는 없지만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4년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 식구가 찾아갔을 때 이번에도 변함 없이 향기로운 녹차를 돌리고 저녁에는 집 밖에 장작불을 지펴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야 뭐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듯한 자리이기에 소주 서너 잔에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나는 문득 고 선생을 통해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생전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술만큼이나 사람도 좋아 하셨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즐겨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다리 밑에 사는 거지들과도 형님 동생하며 술잔을 나눴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나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거지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술을 마시던 날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꺼칠꺼칠한 턱수염으로 우리 형제들의 얼굴을 부비곤 하셨던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다 커서 아버지의 속내를 알 수 있었습니다. 농사꾼이셨던 아버지께서 농기구 대신 술병을 쥘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농토는 도시화 과정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천직이었던 농사일을 할 수 없었기에 결국 술로 위로를 삼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술보다도 사람을 더 좋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몇 년 후 다리 밑에 살았던 거지들이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고물상을 차려 사장님 소리를 듣고 있다는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 슬픔에 잠겨 맥주를 몇 병 사들고 왔습니다. 아버지 무덤을 안내해 달라며 내게 말했습니다.

"생전에 우리에게 값싼 막걸리를 사 주셨지만 우리는 이제 형님에게 맥주를 대접해 드리려고 싶네."

그때 비로소 생전에 아버지가 술보다도 사람을 더 좋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실 때 단 한 평의 땅도 남기지 않고 가족들에게 고통과 술병을 남기셨던 아버지. 하지만 술병과 고통만 남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끈한 정을 남기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등한 인권이니 고통받는 민중이니 그런 사상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했던 거지들은 자신들을 술 친구로 여겼던 아버지를 좋아했고 아버지 또한 당신을 좋아하는 그런 거지들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저 사람이 좋아서 사람들을 만나 정을 쌓아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아오고 있는 예림산방의 고 선생도 그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고 선생은 내게 그랬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동생이고 나는 형이다. 이제 여기는 너희 집이고 네 집은 우리 집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이런 게 아니겠수까?"

두 번째 만남이지만 제주도에 와서 동가식서가숙 하고 있는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며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 역시 그런 고 선생이 마냥 좋았습니다. 그 기분 좋은 만남에는 때묻지 않은 제주의 원시적인 숨결이 있었습니다.

고 선생은 예림산방 홈페이지(www.yelimsb.com)에 이런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시선이 따뜻한 사람에게 자연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나는 그 구절을 뒤집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주의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시선이 따듯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예림산방 고영석씨가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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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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