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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느릿느릿 박철
지난 주 목요일 박도(58. 朴鍍) 선생님이 방학을 이용해서 교동 우리집을 방문해 주셨다. 너무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박도 선생님과는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이름이 비슷해서 혹시 두 사람이 형제가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가끔 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형님처럼 존경하는 분이다. 나보다 연배가 꼭 8년이 위이다. 그동안 전화나 메일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다가 박도 선생님이 직접 교동을 찾아 주셨으니 송구하기 그지없다.

<오마이뉴스>에 박도 선생님 이야기가 올라오면 나는 거의 빠트리지 않고 읽는다. 박 선생님의 글을 읽을 적마다 느끼는 것은 글이 담박하기도 하지만 대단히 솔직하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쥐어짜서 쓰는 글이나 뜬구름 잡는 식의 글이 아니다.

중국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가의 유적답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의식이 투철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의 불길에 사로잡힌 인간 특유의 오만함을 찾아 볼 수 없다.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냉혹하리만큼 자기반성이 철저하신 분이다.

전화를 받고 배 터로 모시러 나갔더니 박 선생님이 이미 도착해 계셨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모자를 쓰셨는데 단아한 인상이다. 박도 선생님은 우리집에 도착하자마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신다. 모든 사물이 박 선생님의 표적이다. 그런 관찰력으로 하여금 10권의 저서를 남기셨을 것이다.

내 서재에 들어와서 두어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본다.

ⓒ 느릿느릿 박철
- 박도 선생님 글은 읽을 때마다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글을 쓰실 때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는지요?
"글을 쓸 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들려주듯이 씁니다. 글을 어렵게 쓴다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읽기 쉽게 쓰되 참되고 진실한 마음을 놓쳐서는 안되겠지요."

- 박도 선생님의 유년, 청소년 시절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소년 시절은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속에 매우 다복하게 자랐습니다. 청소년(중·고)시절은 집안이 기울어진 탓으로 매우 힘들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런 어려운 시기를 참고 이겨냈기에 오늘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 평소 하루 일과를 어떻게 소일하시는지요?
"이제까지는 아침이면 학교에 가서 지내고 저녁에 돌아온 후에는 틈틈이 글을 쓰면서 살아왔는데, 앞으로 텃밭도 가꾸고 산에 가서 땔감도 마련해서 군불을 지피는 산골 나무꾼 작가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니까 어떻게 지낼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아무튼 그동안 하고 싶었던 글쓰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박도 선생님과 함께 지석교회 앞에서
박도 선생님과 함께 지석교회 앞에서 ⓒ 느릿느릿 박철
- 교직 생활을 상당히 오래 하셨는데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와 바람직한 교사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한동안 말썽부리던 녀석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 찾아왔을 때나, 제자들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상은 정직한 교사, 양심을 가진 교사라고 생각하지요. 이런 분이 교단이 가득했다면 오늘 우리나라가 이런 부정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 역시 그 책임을 느낍니다. "

- 결혼 주례를 해보셨는지요? 짤막하게 결혼 주례사를 소개해주십시오.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장점과 단점)을 떠라. 결혼 후에는 한 눈(장점)만 뜨라는 서양속담을 인용하고 특별히 ‘인내’를 강조합니다. "

- 올 2월말 교단생활을 접고 낙향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결심을 하셨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리 하셨는지요? 낙향 후 계획은 어떠신지요?
"먼저 밥값을 못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정년을 5년 남게 두고 물러나는데 내 자리를 젊은이가 메울 것임으로 백수 한 사람 구제하기 하는 일도 되지요. 앞으로 계획은 많지만 말이 앞설 것 같아서 망설여집니다. 크게는 아름다운, 바른 세상을 만드는데 한 밀 알이 되고 싶습니다."

ⓒ 느릿느릿 박철
- 지난번 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성금 캠페인은 네티즌들의 엄청난 성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셨는지요? 그리고 앞으로 미국 워싱턴 방문에 계획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웨덴에 사시는 한 독자가 권중희 선생 취재를 요청하였습니다. 권중희 선생은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12년간 추적하면서 응징한 분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마지막 소원을 여쭸더니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되면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기록청에 가서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50년 6.25전쟁까지 해제된 비밀문서를 마음껏 열람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사가 나가자 네티즌들이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 성금을 제가 주선해서 모금하라고 했습니다. 성금이 현재 3700여만원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권중희 선생도 일부 네티즌도 제가 함께 가서 전 과정을 취재해서 알려달라고 요청해서 출국할 예정입니다.

2004년 1월 31일에 출국하여 3월 17일에 귀국 예정입니다. 전 과정을 기사로 다른 형식의 글로 모두 기록해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문가의 말씀으로는 국립문서기록청에는 약 500만 파일의 문서가 보관돼 있다는데, 거기서 굴절된 우리나라 현대사 자료를 찾는 일은 모래톱에서 진주를 찾는 일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군요.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설령 이번에 못 찾으면 후배나 후손 중에 누군가를 찾을 것이라는 씨앗이나 뿌리는 심정으로 갈 생각입니다.

혹자는 헛돈 쓴다고 비판하는 분도 있지만 백범 선생 암살 진상도 모른다는 것은 후손이 될 자격이 없지요. 밥만 먹으면 사람이 아니지요.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백범 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존경했습니까?

지금 나라꼴은 마치 마산 부두 매립지에다 건물을 세운 거나 같습니다. 이제라도 기초를 다지고 기울어진 건물을 부셔버리고 새 건물을 세워야지요. 잠깐의 고통과 혼란을 피하면 두고두고 기울어진 건물에서 살게 됩니다.

권중희씨 마침내 이달말 미국행 기사(2004.1.26)
권중희씨 마침내 이달말 미국행 기사(2004.1.26)
이 일을 추진하면서 '한 국어교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라고 자문자답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닌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역대 정권이 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 불씨를 지펴야합니다. 그래야 후일 부끄럽지 않는 백성이 됩니다.

네티즌들의 성원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백성들 가슴속에 담긴 민족혼을 읽을 수 있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침 이 열기가 친일파 인명사전 모금에도 이어져서 흐뭇합니다."

- 중국 항일 유적 답사기는 <오마이뉴스>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안동 MBC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3·1절 특집으로 1월 하순에 갈 계획이었다가 만주지방의 날씨 관계로 8·15 특집으로 연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1999년, 2000년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상해, 북경, 동북삼성 등 항일유적지는 샅샅이 뒤졌습니다. 안중근 홍범도 이상룡 김약연 윤동주 양세봉 김동삼 윤봉길 김구… 등 헤아릴 수 없는 선열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의 발자취가 사라지는데 많은 울분도 느꼈습니다.

저는 교육자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젊은 세대를 위하여 아주 쉽게 썼습니다. 2000년에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책으로 펴냈던 것을 지난해에 다시 다듬고 손보아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했었습니다.

하나의 여담은 하얼빈 동북렬사기념관에서 허형식이라는 위대한 독립전사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은 제 고향 경북 구미 임은동 분으로 왕산 허위(마지막 의병장) 선생의 조카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대단한 인물로 알아주는데 정작 고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솔직히 고향사람인 저도 임은동 건너편 박정희 대통령만 알았지요. 그분을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지요. 1942년 일제가 최후 발악으로 빗질 토벌을 하는데도 그분은 결코 소련 땅으로 가지 않고 무장투쟁을 하다가 만주 땅에서 33세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제 방에는 그분의 사진을 네 해째 걸어두고 있지만, 아직도 그 모습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성균관대학의 장세윤 교수도, 대한매일의 정운현(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기자도 만났지요. 장 교수는 그분을 연구한 국내 유일의 학자요, 정 기자는 국내 언론에 처음 보도한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마이뉴스> 기자가 된 겁니다. 저는 그분의 모습을 그리는 일은 평생 숙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느릿느릿 박철
- 어려운 질문인데 인간, 박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청소년 시절의 꿈을 다 이뤘기 때문입니다(비록 무명이지만). 어렸을 때의 꿈이었던 교사가 되고 작가가 되고 기자까지 되었으니…. 그리고 자화자찬 같은데 집념이 강하다고 할까요."

- 가족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내자와 딸(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이론과 2년 재학) 아들(회사원)이 있습니다."

- 끝으로 교단생활을 접으면서 간단한 소회와 청소년들에 대해 고언을 부탁드립니다.
"교육을 바로 해야 나라가 바로 된다고 믿습니다. 특기적성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보충수업, 자율학습이라는 타율학습, 이런 게 모든 학교에서 모두 없어져야 학교 교육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 자식만, 내 학교 아이만 잘 되는 교육이 나라를 망칩니다. 정말 정말 정말 정직한 교육을 해야 정직한 나라가 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박도 선생 소개

박도 선생은 1945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 구미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의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의 오산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이대부속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다. 작품집에는 장편 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면 산다> 산문집 <비어있는 자리> <애물단지> < 아버지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 <아름다운 열매> <샘물같은 사람> 등이 있다. 올해 2월말 경 명예퇴직후 귀농하여 글쓰기에 전념할 계획이다.
장시간의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 사람의 모든 가치를 물질과 권력이 지배하려고 드는 시대에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을 잃고 사는지 박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박 선생님은 우리 시대에 잊혀진 것 같지만 잊혀지지 않은,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아직 살아있는 역사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역사의 파수꾼 같은 분이다.

남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마다 않고 자기만을 위한 일이면 삼가는 마음이 깊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더 없는 행복이다. 요즘 그러한 사람을 만나기 너무나 어려운 까닭에 박도 선생님과의 조우(遭遇)는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오늘같이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가뭇한 시절에 박도 선생님같이 마음이 듬직하여 행동이 진실하고 일마다 신중하여 한결같은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세상 어디서 그러한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살벌한 세상일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기댈 수 있는 언덕과 같은 사람이다. 박도 선생이야말로 그런 분이다. 언제나 역사의 진보와 정방향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분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 모두가 존경할 만한 진정한 엘리트요, 사표가 아니겠는가.

박 선생님은 앞으로 더 열심히 글쓰는 작업에 정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시대 글을 쓴다는 행위자체가 우리에게 냉엄한 도덕적 사회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실천적 결단까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도 선생님의 <샘물 같은 사람>이라는 책에서 소설가 박범신씨의 말이 생각난다.

권중희 선생과 박도선생
권중희 선생과 박도선생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박도씨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황야와 같은 세상에서 오늘도 등불처럼 따뜻하고 귀한 사람을 찾아내어 간결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밝고 향기로운 샘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박범신씨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오늘 나의 사족에 가까운 예찬이 군더더기가 되어 혹여 박 선생님께 누가 될까 염려된다. 박 선생님과 헤어지고 돌아와서 내 서재에서 잠시 묵상을 한다. 한 사람의 몫이 이렇게 큰 것인가. 깊은 뉘우침이 든다.

이제 1월 31일부터 박도 선생님은 권중희(66) 선생님과 함께 백범 김구의 죽음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미국 워싱턴 방문길에 오른다. 박도 선생님과 권중희 선생님의 장도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라며, 박 선생님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뜨거운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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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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