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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느릿느릿 박철
부모 된 이들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지켜 볼 때이다. 나와 아내는 결혼이 조금 늦은 편이었고, 몸이 약한 아내가 두어 번 유산을 하고 낳은 아이가 아딧줄이다.

해산할 때가 오자 아내는 서울 친정으로 올라가고 집에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나는 예배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아내가 아무 탈 없이 아이를 출산해 주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아내가 서울에 올라간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시골에는 전화가 있는 집이 흔치 않았다. 그 때 우리집은 전화가 없어 뒷집 전화를 신세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연락이 없었다. 하릴없이 멀건이 앉아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연숙이 엄마가 밖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전도사님요, 전화 받으시래요, 사모님 엄마래요.”


연숙이 엄마가 전화 받으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연숙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수화기를 집어 들었더니 대뜸 장모님이
“박 서방, 축하하네, 주숙이가 아들을 낳았어. 둘 다 건강하니 안심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복권 1등에 당첨 되면 이보다 더 기쁠까?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쁨이 몰려왔다. 옆집 상희 할머니가 나를 보자,
“전도사님요,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 하소?”
“우리 집사람이 아들을 낳았대요.”
“야, 전도사님 좋으시겠다. 그럼 얼른 서울에 올라 가보셔야 되지 않겠소.”


ⓒ 느릿느릿 박철
정선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가는데 기차 속도가 왜 그리 느린지. 얼마 가다 기차가 서는데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내를 보고 신생아실로 달려가 처음으로 내 새끼를 보는데 창피하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다. 처음에는 젖이 안나와 고생했다. 그래도 자꾸 젖을 물리니 젖양도 늘어났고 아딧줄은 엄마의 젖을 먹고 투실투실하게 잘 자라 주었다.

사람들은 영락없이 아비를 닮았다고 한다. 아딧줄은 어려서부터 아무거나 잘 먹었다. 이유식은 삶은 감자를 으깨 된장국으로 간을 맞춰 주었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 보니 초콜릿이나 과자를 먹을 줄 몰랐다. 병설유치원을 다닐 때 간식으로 초콜릿을 주는데 먹질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억지로 초콜릿을 먹다가 다 토하고 말았다. 아딧줄은 순전히 신토불이 토종이다.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는데 지금까지 3번 이사하는 동안 전부 시골에서만 자랐다. 다행히 아파서 병원신세를 진 적이 거의 없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오늘 아침 앨범을 뒤적이며 17살 아딧줄 지난날을 돌아본다.

감사할 사람이 많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에게 감사한다. 나는 좋은 아빠가 되어주질 못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 내가 노트에 적어놓은 아딧줄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지난 5월 첫 주, 야외예배를 다녀 온 후 아딧줄은 훌라후프 선수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활초국민학교에서 게임을 하던 중, 훌라후프 돌리기가 있었는데 아딧줄의 상대는 한살 위인 진희였다. 진희는 훌라후프를 잘 돌리고 자기는 그저 엉덩이 몇 번 흔들면 그만인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씩씩거리면서 훌라후프 돌리기에 열중이었다.

처음에는 저 녀석이 몇 번 저러다 그만 두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못 말릴 상황이 전개되었다. 머리통부터 시작해서 어깨 죽지, 엉덩이까지 온 몸을 흔들어 대면서 돌리는데, 어디 그게 제 마음대로 돌아가는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훌라후프는 고작해야 서너 번 엉덩이 근처에서 빙글거리다 금방 털석 주저앉고 마는 것이었다. 어쩌다 운 좋게 조금 진전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다음 번에는 여전히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면서 대단히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땀은 비오듯 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도 포기할 줄을 모른다. 아무래도 안 될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아딧줄 몸과 훌라후프는 서로 따로 도는데, 지 애비를 닮아서인지 운동신경은 젬병이다 싶었다.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어쩌랴 훌라후프를 못 돌린다고 해서 크게 대수이랴.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다행히 훌라후프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줄넘기나 곤봉이 있었는데, 역시 나는 재주가 없었다. 곤봉은 어쩌다 가을 운동회 마스게임 때나 한두 번 하는 것이었기에, 그럭저럭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줄넘기는 상황이 좀 달랐다. 걸핏하면 체육시간에 줄넘기를 하는데, 선생님은 내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고, 청백 양편을 가르고 반환점 돌아오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한반에 줄넘기를 못하는 친구가 한두 명이 있었다. 그 시절은 거의 남녀비율이 대등한 시절이어서 특히 운동을 잘 한다든지, 노래를 잘 한다든지 하면, 여자 애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던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영락없이 주눅이 들어, 처음부터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한 번 줄을 껑충 넘으면, 몇 발자국 어기적거리고 가다가 또 한 번 껑충 넘는 식으로 연속동작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생님과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데, 내 뒤통수로 전달되어 오는 창피함이란, 그 숫기 없는 시골뜨기가 감당하기란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 느릿느릿 박철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출발점으로 돌아올 때면, 그 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어떻게 맞닥뜨려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딱히 체육시간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줄넘기만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나의 징크스였다.

아딧줄의 훌라후프 돌리기는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첫날보다 폼이 훨씬 안정이 되었다. 제법 훌라후프가 허리에 감기는 게 역시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서양 속담대로였다.

거의 일주일간, 아딧줄은 훌라후프 돌리기에 매달렸다. 벌써 허리 양쪽에는 벌겋게 살갗이 벗겨졌다. 상처에다 연고를 발라가면서 돌리고 돌렸다. 그로부터 우리 아딧줄은 훌라후프 선수가 되었다.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아딧줄이 엉덩이만 살살 달싹거리면서 자유자재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모습을. 하늘보다는 땅에 더 가까운 녀석이 팔짱을 끼고, 별로 땀도 안 흘리며 하고 싶은 참견은 다하고 엉덩이만 달싹거리면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인들 했겠는가?

나는 한마디로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제 7살짜리의 승부욕이 어찌 보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락없이 지 애비를 닳은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가장 취약한 약점을 어느새 간파했는지,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해 가는 몸짓으로 생각하니 참으로 대견스럽다.

어제는 이 녀석이 훌라후프를 3백번도 더 돌렸다. 3백 번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강요 없이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 일궈낸, 그런 아딧줄의 상승행위(上昇行爲)가 자신의 삶의 내용을 더욱 옹골지게 가꿔가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다. (1994년 5월 22일)


ⓒ 느릿느릿 박철
세월이 한참 지났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딧줄을, 이제 놓아주려고 한다. 그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녀석이 자신의 앞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비로서 궁금하다. 좋은 생각만 했으면 한다. 인간의 삶이 훌라후프 돌리는 것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세상이라는 넓은 무대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 아들 아딧줄, 화이팅!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며

▲ 현재 아딧줄 모습

내가 생각해도 정말 빠르게 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 아빠 전부 같이 가서 사진도 찍고 제일 좋은 외식인 자장면을 먹고 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일기에 전부다 썼었다.

평생 초등학교 1학년일줄 만 알았던 내가 벌써 중3이 되었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얼겁결에 반장이 되어 수학 문제지에 채점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한일근 선생님과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나의 손을 잡으시고 귓속말로 “반장으로서 선생님 도와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아딧줄이가 크면 우리 한번 다시 만나자”라고 하셔서 내가 운동장에서 혼자 울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황병학 선생님을 만나 지금까지 나에 대해 반성도 해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 3이 되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고참 학년이 부러웠었다. 그런데 6학년도 해보고 이제 중학교 최고참 학년인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어쩌면 내 미래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내 진로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3이 되면 시험도 많아지고 2학기 때는 졸업준비 때문에 시험도 빨리 본다는데 정말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과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에 충실해야겠다. 그래서 한일근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말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그 분을 만나고 싶다.
(2003년 3월 1일) / 박아딧줄(교동중학교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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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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