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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기구한 서울시의회 건물

▲ 한때는 국회의사당으로 권력의 산실이었으나 지금은 초라한 서울시의회가 된 옛 부민관.
ⓒ 박도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사람으로 치면 팔자가 매우 기구하다. 영고성쇠, 단맛 쓴맛에 오물까지 다 맛본 건물이다.

한때는 국회의사당으로 제1, 제2공화국을 탄생시킨 권력의 산실이었지만, 지금은 “수도 이전 결사 반대” 라는 플래카드를 매달고, 하늘 높이 치솟은 코리아나호텔 건물에 짓눌려 초라한 몰골로 버티고 있다.

이곳은 원래 흥천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일제는 1935년 12월 부민관(府民館)이란 현재의 건물을 준공시켰다. 그때로서는 장안의 최고 명물이요, 최신의 건물이었을 게다.

애초 부민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개관했을 테지만 일제는 문화공연장으로 보다 식민지 백성을 순치시키는 정치선전장으로 더 많이 썼다.

특히 태평양(대동아)전쟁 발발한 후에는 민족반역자들이 앞장서서 조선인 징용노무자 동원이나 조선인 학병 지원 궐기대회, 여자정신대 지원 궐기대회나, 국민총진격 대강연회를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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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선문인보국회에서는 국민의용대의 발대를 기념하는 문예와 음악의 밤을 개최하기도 했던, 민족반역자들이 다투어 꼬리치면서 일제에 충성을 다 바치고자 맹활약하던 주 무대였다(임종국 지음, <일제침략과 친일파> 196쪽 참고).

해방 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사오입 개헌, 2.4 보안법 파동, 국가재건회의본부, 3선개헌 날치기 통과(정작 의결은 건너편 별관에서 이루어졌지만) 등 영욕의 터전이기도 했다.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간 후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초라한 공연장이나 민방위 교육장으로 역사의 뒤안길에서 지내다가 1991년 7월부터 서울시의회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부민관 폭파 의거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 박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을 무심코 지나치나 서울시의회 정문 계단 아래를 눈여겨보면 <부민관 폭파 의거 터>라는 자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면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다.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진짜는 다르다

몇 해 전 광복절을 앞둔 날,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청와대 초청 오찬에 모두 참석하였지만 당신은 끝내 그 자리에 가지 않고 시청앞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1인시위를 하신 모난 분.

동지들의 보훈 신청은 당신 손으로 다해 주고도 정작 당신은 보훈 신청을 마다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오다가 사위가 몰래 공적심사 신청을 해서 뒤늦게야 보훈대상자가 된 별난 분.

나는 <의를 좇는 사람> 네번째 인물로 그를 모시고자 노심초사하던 중, 지난해 11월 천안공원묘지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제에서 만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에게 인터뷰 주선을 부탁드렸다.

지난해 11월 마지막 목요일, 기왕이면 역사의 현장인 부민관(서울시의회) 정문에서 만나 뵙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여태 조문기 선생님을 뵌 적이 없는지라 분위기 조성을 위해 늘 길 안내를 맡았던 이항증 선생에게 부탁드리자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마침 그날은 수업이 적은 날이라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조퇴부에 기록한 후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만날 장소로 가서 부지런히 현장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가 “박도 선생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 분은 조문기 선생은 몸이 불편해서 인근 사무실에서 기다린다면서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나중에야 그분이 조선민족대동단 기념사업회 차영조 사무국장임을 알았다.

▲ 지난 19일 저녁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 달성 기념 행사에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조문기 선생이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핑계였음이 곧 드러났다. 당신이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의거 현장에서 포즈를 취해 사진 찍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영 거북해서 그 누구에게도 현장 사진 촬영을 응하지 않았다는 조 선생의 말씀이었다.

일제 때 친일을 하고도 얼굴 두껍게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세상에, 만천하가 다 아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도 내세우지 않는 선생의 겸양지덕에 과연 진짜 독립운동가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선생은 수 백명이나 되는 생존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친일청산 문제에 강한 집념을 보여왔으며, 평소 "나 죽으면 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넣어달라"고 얘기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땐 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어서 오세요. 박도 선생, 아니 박 동지.”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박 동지라는 호칭은 저에게 맞지 않습니다.”

“박 동지가 쓴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책을 봤어요. 상해 북경 만주의 그 많은 항일유적지를 다 둘러보고 다음 세대를 위해 책을 낸 사람은 나에게는 마땅히 동지입니다. 총칼 들고 일제에 대항한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에요. 붓을 들고 진실을 전하는 것도 소중한 독립운동이에요. 나는 아직 우리나라가 완전히 독립된 나라라고 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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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인 데도 마치 집안어른을 뵌듯이 아주 편케 맞아주셨다.

- 1945년 7월 24일이라면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는데 경비가 삼엄한 부민관에 폭탄을 설치하여 터트린 그런 끔찍한 일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땐 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당시 내 나이 스무 살로 목숨 아까운 줄도 몰랐고 정말 겁도 없었어요. 아마 지금 같았으면 목숨이 아까워서도 못했을 겁니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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