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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yes24
경제 발전이나 교육 수준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반해 시민의 정치의식은 한국전쟁 이후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없어 때로는 비애감(?)에 정말 '국민성'인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무작정 답답하기만 하던 내게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제공해 준 책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다.

문제는 '시민의식의 부재'였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 의식'의 부재인 셈인데 나에게 가장 가슴을 치며 다가온 말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내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코 선진 국민 의식으로 발전할 수 없는 걸림돌이 바로 이 노동자 의식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 쓰인 대우차 사건만 비추어 가까운 주변의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한 번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연구소의 연구원이던 친구의 신랑이 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회사가 헐값에 넘어갈까 파업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그 친구에게 "요즘 지내기 어때? 신랑 회사는 괜찮아?"하고 물으면 "별 상관없어. 연구원이잖아"하며 노조원과는 다른 신분(?)임을 강조했다. 그 당시 그 말에 얼핏 참 미묘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 복잡한 감정의 명쾌한 설명이 여기에 있던 것이다.

홍세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 귀족이란 말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국가 귀족'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국가귀족이 국가의 공공기관 부문만을 장악하고 있지만 한국의 사회 귀족은 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귀족의 전통적 덕성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난공불락과도 같은 귀족 사회의 성채를 허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연대가 결성되어, 하루 8시간 노동, 주 5일 근무제, 주택정책, 교육비의 국가부담까지 두루 지적해야 하고, 사회 귀족의 무기인 힘의 논리라든지 서열의 논리를 깨뜨리는 게 필요합니다.

더욱이 합리와 이성이 온 사회에 보편화 되도록 힘써야 하며, 고교 평준화뿐만 아니라 대학평준화까지 유도해 내야 하며, 사회 귀족을 지지하거나 침묵하는 지식인과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 언론의 헤게모니에 빠져들기보다는 그들 모두가 진리의 아가리를 열도록 해야만 합니다."

홍세화씨 글은 참 날카롭고 명쾌하다. 프랑스 사회와 비교하면서 읽을 땐 우리 현실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에밀졸라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자기역할이나 해직동료를 위해 법정에까지 선 르노자동차 노동자들.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 아니 이런 사람들이 소리를 내기엔 이 사회의 토양이 너무 척박하다. 왜일까?

지난달 읽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중에서 할머니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두 가지 마음 중 물질에 쏟는 마음만 너무 쓰다보면 영혼의 마음이 너무 작아져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고 하셨던가. 우리 나라는 전쟁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경제발전에만 치우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하는 물질적인 마음만 커져온 것 같다.

악역을 자처한 자. 나를 고소하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자. 홍세화 씨 같은 진정한 지식인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사회 귀족은 사회 귀족 나름대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치부를 객관적인 시각과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시도를 할 때 적외선 안경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안경은 택시 운전사의 눈과 같아서 지금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지나온 길을 끊임없이 되돌아 보도록 도와줄 것이고, 과거에 잘못 들어선 길을 반복해서 가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계속 점검하며 수정하려고 노력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의 베스트리뷰로 뽑힌 최진형(inavyblue) 님의 글입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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