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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우리 교회에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 단골로 오는 피아노 조율사 손경준(58)씨가 있다. 이 분은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신데 6·25 전쟁 때 부모님과 함께 교동으로 피난을 오셨다고 한다. 그 때 나이가 2살이었으니 그 때의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었을 게다. 연백에서 목선을 타고 어머니 품에 안겨 교동으로 피난을 왔는데,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고 한다.

작은 교동섬은 피난민으로 바글바글 했고, 그 당시 유행어였던 "삼년 숭년에 모 있꽈네"라는 말대로 극심한 흉년으로 모든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했다. 손경준씨 가족은 어디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의지할 때가 없어 교동섬에서 13년 동안 네 차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저야 어렸으니 잘 모르지만 고생 억수로 했지요. 땅 한 마지기 없으니 완전 떠돌이 신세였어요. 제일 처음에는 인사리에서 살다가 고구리로, 고구리에서 몇 년 살다가 읍내리로, 나중에는 상룡리로 이사를 갔어요. 상룡리에서 7년을 살았어요. 그래도 상룡리에서 살 때가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어요. 부모님이 양계를 하면서 집안 살림도 조금 커지고 땅은 없지만 살 만했어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은 많았어요. 교동국민학교를 졸업(47회)하고 교동중학교에 입학에서 2학년 과정을 마치고 3학년 강화 중학교로 전학을 했지요."

손경준씨의 직업이 피아노 조율사지만, 어려서부터 음악에 취미가 있고 청각이 뛰어나서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대 후반 어느 날, 조카사위 되는 이선구 목사(현재 중국에 거주)가 "삼촌, 삼촌은 음악에 재능이 있으니 피아노 조율을 한번 배워 보시는 게 어때요? 앞으로 피아노 조율사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고 한번 해보시지요"하고 권면해서 그 길로 서울 낙원상가를 찾아 갔다고 한다. 거의 30년 전 일이다. 그 당시만 해도 피아노가 있는 집은 비교적 부유층 가정이었다.

손경준씨는 처음 피아노 조율을 배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아노 조율을 배우는 데 재밌었어요. 내 적성에 맞고 힘들지도 않고 즐겁게 기술을 배웠지요. 피아노 조율은 피아노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지요."

- 피아노 조율을 배우고 처음 피아노 조율을 하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어요.
"무진장 떨렸어요. 손에 땀이 나고 긴장에 되는데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튜닝을 하고 완벽하게 조율을 다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작업 도구 하나를 피아노 속에 빠트리고 왔어요. 의사가 수술하다가 긴장한 나머지 수술용 칼을 사람 뱃속에 집어 넣고 꿰맸다는 식으로.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피아노 조율을 해 준 집에 다시 가서 작업 도구를 찾아왔지요. 그런 실수는 수도 없이 많이 했지요."

ⓒ 느릿느릿 박철
- 피아노 조율사를 몇 년이나 하셨어요? 그리고 직업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하고말고요. 저는 한번도 내가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피아노 조율사 생활은 27년 동안 했는데, 어디든지 나를 불러주면 불원천리 마다 않고 달려갔어요. 단순히 피아노 조율을 직업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사명감을 갖고 일을 했어요. 아무리 좋은 고가의 피아노라고 할지라도 음이 맞지 않으면 좋은 소리를 낼 수도 없고, 그런 피아노로는 연주를 할 수 없지요. 음이 맞지 않는 피아노에 내 손길이 닿아 제 소리를 낼 때,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르지요 피아노가 저에게 기쁨을 주고 삶의 활력을 주지요."

-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나요?
"제가 교동 출신이기도 하지만 주로 강화로 많이 오게 되요. 그런데 어려운 개척 교회나 가난한 교회는 그냥 무료로 봉사해 주지요. 피아노 조율이 무슨 재료비가 드는 것이 아니고, 기술만 있으면 되니까 몸으로 봉사하고 나면 흐뭇하지요. 제가 아들만 둘이에요. 28살, 21살. 그런데 큰 놈은 직장 다니고 둘째는 지금 대학교 2학년이지요. 그래도 내가 가방 하나 들고 전국을 다니며 피아노 조율해서 번 돈으로 두 아들 대학까지 공부 시킨 게 제일 큰 보람이지요."

손경준씨가 우리 교회 피아노 조율을 와서 작업을 다 마치고 나면 꼭 노래를 한곡 부른다.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가곡을 부르기도 하는데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다. 탁월한 '테너'다. 손경준씨는 피아노 조율을 천직으로 생각한다. 작업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30년 가까이 피아노 조율이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자기 직업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이 없다며 즐겁게 살아가는 손경준씨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손경준씨는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피아노 브랜드와 상태를 다 알 정도다. 하지만 IMF 이후 고객도 많이 줄었다. 중고 피아노도 많이 나오고 있고, 전에는 하루에 피아노 조율을 많게는 5-6대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나라 경제 사정이 전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 손 선생님은 차가 없으세요? 차 없이 전국을 다니시려면 힘드실 텐데 특별한 철학이 있으신가요?
"저는 일부러 운전을 안 배웠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는데 차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요즘은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해서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차를 몰고 다니면서 운전하는 일에 신경 쓰고, 각종 사고에 노출되고, 대기 오염 시키고, 돈도 없애고…. 그래서 아예 운전을 배우지 않았어요. 제 나이에 운전 못하는 사람, 승용차가 없는 사람 거의 없지요. 그래도 저는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요. 버스가 시골 구석구석 다 다니는데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하고 좋은지 몰라요."

ⓒ 느릿느릿 박철
- 언제까지 피아노 조율을 계속하실 건가요?
"제 목숨이 붙어있는 한, 아니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할 생각 이예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즐겁고 좋은데, 또 누가 해라 마라 할 사람도 없으니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지요."

손경준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이웃 교회에 피아노 조율할 것이 있다고 해서 차로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손경준씨는 피아노 조율사 30년 인생을 살아왔다. 수만 대가 넘는 피아노가 그의 손길을 거쳐 갔다. 손경준씨의 손을 거쳐 간 피아노가 지금도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사무실이나 승용차도 없다. 지난 30년 동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를 만나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오늘도 그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자신을 불러주는 곳으로 달려 갈 것이다. 그는 새해 벽두에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이다.

덧붙이는 글 | 손경준씨는 현재 의정부에 살고 계십니다. 피아노 조율이 필요한 경우 서울이나 경기 일원은 불러만 주시면 가실 수 있습니다. 피아노 조율이 끝난 다음 꼭 노래를 청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016-233-5410, 031-873-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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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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