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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신년 1월1일 오전 7시 30분. 난곡 골목의 풍경이다.
ⓒ 김진석
낮은, 혹은 길게 늘어진 골짜기. 난곡(蘭谷).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106번 종점에 이르면 1970년대 초 주택 개발사업으로 조성된 저소득층 밀집 주거 지역 난곡(신림7동)과 만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서울의 달동네 난곡은 2004년을 재개발의 혈흔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비탈길마저 밤사이 내린 서리와 안개에 덮여 온기 없는 난곡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왔을 음악원, 연탄이 쌓여있던 광, 언젠가 꽃이 피었던 아담한 정원, 오락 뽑기가 한창이었을 문구점. 그 곳엔 누군가 놓고 간 카네이션이 걸려있었고 무수한 사람들의 손때와 숨결이 고스란히 ‘박제’ 돼 있었다.

새빨간 글씨로 새로운 주소를 받은 집들 사이 간혹 형광등의 그림자가 끈질기게 새어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들 주변엔 언제나 검은 연탄이 맴돌았고 가져갈 사람도 없다는 듯 연탄은 동네 어귀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 난곡에서 10여년간 생선 장사를 하고 있는 채정자씨
ⓒ 김진석
난곡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흔적 대신 한기 서린 적막한 안개로 갑신년을 시작했다. 2004년 1월 1일 아침 7시 30분. 가물거리는 동네 어귀의 가로등을 뒤로 난곡의 고요함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발그레한 립스틱에 연노란 눈 화장까지 곱게 한 채정자(55)씨. 그는 생선에 넣을 얼음을 부수고 생선을 진열하는 등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며 새해 첫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삼남매를 둔 채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노량진 수산시장 방문으로 갑신년을 열었다. 목포가 고향인 그 또한 이사 비용 보조비를 지급 받아 곧 어딘가로 장사 터를 옮겨야 한다. 시에서 받을 보상비용과 장사 터에 대해선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그는 “없는 서민들을 단 일이 년만이라도 더 살게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 요즘 같은 불경기에 젊은이도 그리 취업이 안 되는데 그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 시작 할지 걱정이다”고 말을 이었다.

10년간 같은 자리에서 생선 장사를 했던 채씨는 새해 메뉴로 얼큰한 ‘생태찌개’를 권했다. 국산 생태와 수입(중국산) 생태는 등과 길이에 따라 구분 할 수 있다. 채씨는 등이 노랗고 짧으면 국산, 등이 검고 길면 수입산이라고 귀띔했다.

매번 곱게 화장을 한다는 그는 생선의 품질만큼이나 사람의 인상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장사 터가 자신의 소유이기에 먹고살기가 힘든 건 아니라고 솔직히 고백한 채씨. 그런 그가 곱게 화장을 하고 난곡에서 장사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람이 그렇잖아요. 항상 보던 사람이 안 보이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장사는 안 돼도 분명 단골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제가 없으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채씨는 자신의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즐겁다며 2004년에도 ‘건강’과 ‘ 장사 잘되기’를 빌었다. 이어 그는 나라님에게 힘을 보태며 정치인들에게 건네는 당부 또한 잊지 않았다.

▲ "이제 정치 하는 사람들 그만 싸웠으면 해요." 채정자씨가 전한 새해 메세지다.
ⓒ 김진석
“작은 한 가정 안에서도 의견이 다 제각각인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큰 국가에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건 오죽 힘들겠어요. 지금 이 시기엔 누가 대통령을 해도 다 똑같이 힘들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어야 해요. 어차피 정치는 결국 모두 서민을 위해 똑같은 목표를 가지는 거잖아요. 그러니 이젠 제발 싸우지 좀 말았으면 해요.”

철거가 한창인 난곡의 어느 서민은 그렇게 갑신년을 맞이했다. 항상 ‘서민’을 위한다며 싸우는 어떤 이들의 ‘서민’과 채씨는 다른 사람인 것일까. 재개발의 혈흔이 낭자한 인적 드문 난곡에 언제 손님이 들지 모르지만 채씨는 그렇게 같은 자리 한 마음으로 또 2004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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